몽생미셸 가는 길 176화
겨우내 봄풀의 푸르름으로 싸늘한 한기를 견뎌냈다. 이들의 잔디와 풀은 영하의 날씨에도 잘 자란다. 마음이 스산하더라도 초록빛 풀빛을 보면 다시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쳐들곤 한다.
오늘은 아파트 유리창너머로 뜨락의 풀들이 많이 푸르러졌다. 진초록 풀들 사이 여기저기에 피어난 자그마한 체구의 하얀 들꽃이 반가울 즈음 아침마다 날아온 대여섯 마리 비둘기 떼가 들꽃들을 마구잡이로 뜯어먹는다. 비둘기의 배고픔이 들꽃에게까지 부리를 대게 만든 모양이다.
들꽃이 사라져 가는 아파트 단지 잔디밭 한구석에서 개나리가 샛노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아파트 단지 진입로에 일렬로 서있는 벚꽃나무들마저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렸다. 나무는 우주의 상징이요, 봄꽃은 만물이 소생하는 은유라지만 이 기막힌 자연현상에 맘이 덩달아 들뜨는 이유는 지난겨울이 한참 추웠기 때문이다.
그 추운 겨울날 타고 다니던 낡은 차량이 마침내 멈춰 서고 말았다. 시동을 아무리 켜도 자동차는 묵묵부답이다. 결국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세탁 건조방에서 젊은 청년 아프리카 말리 태생의 공산주의자로부터 소개를 받은 자동차 수리공을 길거리에서 처음으로 대면했다.
얼굴색이 초콜릿 빛이던 삼십 대의 자동차 수리공은 내가 묻는 말에 순순히 자신 역시 아프리카 말리 출신이라고 대답했다. 그를 에워싼 나이 지긋한 사네들 또한 중국을 연호하며 미국과 프랑스는 타도의 대상일 뿐이라고 규정한다.
테러리스트 호소인? 웃기지도 않는 건 그럼에도 왜 그들은 자신들이 혐오하는 프랑스에 사는 걸까?
이와는 달리 뻐드렁이에 웃는 모습까지 귀여운 삼십 대 자동차 수리공은 그들의 수다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착한 구석마저 보이던 말리 출신 수리공,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은 그러나 그의 진단 결과 자동차 상태가 너무나도 심각하다는 것에 곤두박질친다.
차를 팽개쳐 두고 기차로 여행하기엔 날씨가 너무 추웠다. 더군다나 돈 잔뜩 벌어 고국인 말리에 가서 건물 한 채 사서 편안한 삶을 살고 싶다는 빨래 건조방에서 만난 젊은 공산주의자의 절규가 가슴 아프게 떠돌던 봄날, 꽃이 피기 시작했다. 빵집에서 방금 구워 낸 바게트처럼 따듯한 온기마저 전해오는 봄꽃 화창한 날에 다시 집 밖을 나서리라 다짐만 했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왔다.
70킬로미터를 넘어선 속도를 다시 줄인다. 이제는 굴곡진 폭 좁은 길이다. 도로 표지판을 보니 퐁레베크가 가까운 모양이다. 퐁(Pont)은 다리요, 에베크(Évêque)는 주교란 뜻이니, 지명이 성직자와 관련이 깊을 수밖에 없다.
나보다 일찍 이 길을 답사한 이들 셋이 모여 펴낸 역사 유적 답사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리샤르 1세의 손자이자 리지외의 주교인 위그 뒤는 대성당을 완성하고 생 데지흐 드 리지외 수도원을 건립한 인물로 알려졌다. 주교는 또한 리지외 백작의 지위도 갖고 있었다. 모든 후계자들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공작의 권한을 대행하고 있었다.
공작이 집중한 목표는 그의 수중에 있는 교회들을 영적으로나 세속적으로 권위를 갖추게 하는 것이었다. 더해서 교회가 속한 마을들의 경제를 관리 감독하는 기능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세관에 관세를 부과하는 권한을 준 경우가 이에 해당했다.
이와 같은 일들을 착실히 수행하던 위그 뒤는 1077년 어느 날 퐁 레베크에서 중한 병에 걸리고 말았다. 퐁(Pont)은 뚜크 강의 ‘다리’란 뜻이고 레베크(l’Évêque)는 ‘주교’를 가리킨다. 퐁 레베크란 지명은 이와 같이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1]
퐁레베크(Pont-l'Évêque)는 칼바도스의 도청 소재지인 캉(Caen)과 오쥬 지방(Pay d’Auge)의 성소 리지외(Liseux) 그리고 바닷가 어촌 마을인 트루빌(Trouville)을 잇는 길들이 서로 교차하는 지역의 움푹 꺼진 분지에 들어선 마을이다.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이 들판에 잉글랜드 인들을 자발적으로 끌어들여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 간에 분쟁지역이 아닌 평화지역으로 번영을 톡톡히 누렸던 특이하고도 요상한 도시이기도 하다.
이 도시의 정서를 이해하려면 그래서 천 년 전에 노르망디와 영국을 함께 다스렸던 정복왕 기욤(윌리엄)이란 역사적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다음 기회에 후술 할 참이지만,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완충지역이었던 노르망디 공국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중세 때 이 지역에 살던 주민들의 정서를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초원 한가운데 움푹 꺼진 지형에 들어선 마을은 전통적으로 낙농업에 기초한 상업 교차로 구실을 하던 퐁레베크는 지금까지도 매주 이들이 생산한 유제품들과 더불어 농수산물 및 주류들을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거리장터를 지속해가고 있을 만큼 이들이 생산하는 유제품에 대한 사랑은 지독하다.
도시 주변으로는 세 개의 강이 합류하여 바다로 흘러든다. 그 마지막 줄기가 뚜크(Touques)란 강이다. 어느 역사책에서는 뚜크 강에서 프랑스 인들이 최초로 송어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천 년 전 기욤의 선단이 영국을 정벌할 때도 이 뚜크 강을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대서양을 향해 도도히 흐름을 멈추지 않고 있다.
강물이 마침내 그 흐름을 멈추고 바다에 뒤섞이는 곳이 바로 인상파 화가들과 프랑스 최고의 단편 소설 작가 귀스타프 플로베르를 매료시킨 트루빌(Trouville)이란 어촌 마을이다.
보기 드물게 중세 때 지은 망루나 성벽이 없는 도시이긴 하지만 퐁레베크 역시 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피해 갈 순 없었다.
그러나 강과 인접한 뒤뜰과 정원이 있는 아름다운 거주지만큼은 폭격을 피해 목숨을 건졌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던가. 전쟁의 참화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눈물겨웠고 마침내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지원을 받은 건물주들은 아름다운 꼴롱바쥬 양식의 건축물들을 새로 고쳐 짓는 행운을 안았다.
여행자로 하여금 바삐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밀게 만드는 이 독특한 반 목조 가옥은 퐁레베크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건물들 하나하나가 다 다른 모습에 경이로움까지 느끼는 것은 목수의 솜씨가 남다르기 때문일까? 서까래나 대들보, 기둥으로 쓰인 나무들은 자연 생김새 그대로 사용한 솜씨가 여간 예사롭지가 않다.
인간만이 얼굴을 고치고 몸을 고치는 일에 애쓸 뿐 자연은 생김새대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목수 또한 현대 건축가들과는 달리 나무 생김새를 살려 그대로 집을 짓는다. 우리의 한옥이 그렇고 이들의 꼴롱바쥬 건축물이 그렇다.
강물은 흐르는 대로 놔둬야 한다는 자연의 법칙을 목수는 이들의 건축물을 통해 더욱 신념화한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도시는 프랑스 관광청으로부터 꽃을 3개씩이나 받았다. 꽃 4개가 최고 등급이니 꽃 3개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언덕이 많고 푸른 초원, 재래식 요리법인 발달한 퐁레베크는 그런 이유로 이 화창한 봄날 봄꽃이 만발할 참이다.
[1] 미셀 우흐께, 질르 파바흐, 장 프랑수아 세이에흐 공저, 역사기행서 『정복왕 기욤(Guillaume Le Conquérant)』, Orep 출판사, France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