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177화
퐁레베크(Pont-l'Évêque) 마을을 가로지르는 뚜크 강둑에 우뚝 서있는 성미카엘에게 봉헌된 퐁레베크 천주교회는 11세기 원래 노르망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성당이 있던 자리에 15세기에 들어와 고딕 화염 양식으로 새롭게 지은 성당이다. 성당은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그야말로 마을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마을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13세기에 지은 종탑은 서쪽 파사드(정문 입구)에 세워졌다. 본당 건물은 14세기 때 석회암을 쌓아 올린 것으로 그 육중함이 대단하다. 목초지(bocage) 멀리에서도 한눈에 보이는 성당의 모습은 고딕 양식의 건축물들이 그러하듯 장엄하고 묵직하다. 이런 이유로 ‘초원의 대성당(la cathédrale du près)’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2개의 측랑과 중앙 통로에 해당하는 신랑으로 바로 진입하도록 설계되었다. 전형적인 대성당 중앙 회중석 구조다. 특이한 점은 소박한 형태의 신랑(중앙 회중석)과는 대조적으로 좌우 측랑의 천장이 펜던트 형 교차 천장으로 마감되었다는 점이다. 성당 내부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높여 주기엔 이만한 건축술도 없다.
기둥머리 장식 하나 없는 밋밋한 원통형 기둥도 이채롭다. 이제까지 봐오던 성당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이유가 뭘까 하고 성당에 관한 역사 기록물들을 검토해 보니 성당의 개축 공사가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교의 요청에 따라 종끄레 드 훼리에흐(Joncquerets de Ferriére)와 끌레흐몽 앙노쥬(Clermont-en-Auge)의 남작이었던 장 5세(Jean V de Pouchin)의 봉헌금으로 지어진 탓에 아마도 공사 대금이 충분치 않아 저렇듯 밋밋한 원통형 기둥으로 마감했으리라 짐작되는 대목이다.
성당 역시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비껴갈 수는 없었다. 거의 파괴되다시피 한 건물을 새로 복원하였는데 이때 끼어든 것이 참으로 모던한 파이프오르간과 추상적인 스테인드글라스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중세 때의 색유리창을 복원하지 못하고 1964년에 유리 장인인 프랑수아 샤퓌(François Chapuy)가 제작하여 완성하였다. 다소 추상적인 스테인드글라스는 저 아득한 시기에 제작된 시토 회(Cîteaux)의 검소하고도 소박한 유리창을 연상시킨다.
성당 바깥으로 나가자 제일 눈에 띄는 것이 갸르구이유(Gargouille)라 불리는 처마 장식 조각상들이다. 갸르구이유라 함은 우리말로 ‘이무기 돌’이란 뜻이다. 이무기는 구전되는 전설에 바탕을 둔 상상 속의 짐승인데, 물과 관련이 깊다.
이 이무기 돌은 고딕 건축의 특징으로 석회암이 물에 약한 탓에 고안해 낸 고딕만의 독특한 건축술이다. 비가 잦은 프랑스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고딕 건축이 발달했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이무기 형상의 저 처마 밑 장식 조각상이다.
갸르구이유는 빗물의 홈통 구실을 하면서 지붕 위에 떨어진 빗물을 지상으로 쏟아내는 역할을 한다. 하느님의 성전이 빗물에 무너지지 않도록 선함을 베푼 이무기들 모두가 구원을 받는다는 신념이 당시에 갸르구이유를 제작한 조각-건축가들의 믿음이었다. 건축이 종교와 어우러졌을 때 이뤄지는 아름다운 조화로움이라 할 수 있다. 이것 역시 고딕이 구현한 건축 세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참고로 갸르구이유 처마 장식 조각상은 유럽 종교 건축물들 곳곳에서 발견된다.
상징을 넘어선 실용에 바탕을 둔 갸르구이유 처마 장식 조각상들은 위험해 보여도 실상을 알면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조각상 하나하나는 전혀 다른 생김새란 점도 특기할 만하다. 건축 공사장에서 자체 제작하여 끼워 넣은 것이지만, 마치 거대한 돌덩어리를 쌓아 올린 건물에 아슬아슬하게 늘어 뜨린 줄에 매달려 석공들이 하나하나 정성스레 다듬은 것처럼 보인다.
위태로워 보이는 것은 폭풍우에 조각상이 두 동강 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실제 오래된 교회일수록 손상된 갸르구이유들이 많다. 비바람을 맞아 청석이 낀 탓에 손상된 경우도 더러 있다. 하지만 자연적인 손상보다는 전쟁의 참화와 같은 인위적인 요소가 더 크다.
오래된 처마 장식 조각상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인간이 저지른 전쟁의 참화를 떠올려본다. 이들은 기마 민족의 후예들답게 전쟁을 많이 치렀다. 전쟁을 통해 얻은 것은 오직 파괴와 참상뿐이다. 그래도 전쟁을 벌이고자 하는 음모는 유전자적 기질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파괴적 욕망처럼 끈질기다. 투쟁만이 삶을 재건할 수 있다는 의지 때문일까?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종교가 이들에게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