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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Dec 06. 2021

양식의 개화 - 순례자들의 교회 1

앙드레 보느리가 들려주는 로마네스크 예술 이야기 43화

[대문 사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11세기 말에 접어들면 로마네스크 예술이 처음 싹텄던 여러 다양한 지역에서 교회 건축물들에 대한 공사는 이전의 그 어느 시기보다 훨씬 활발한 양상을 띤 채 좀 더 진척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교회는 또한 밀려드는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성골함 제식을 성대히 거행함으로써 본래 그들에게 주어진 성업에 더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산타 마리아 델레스타니(Santa Maria de l’Estany) 성당 기둥머리 장식,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


로마네스크 예술의 두 번째 시기는 동양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시기로 정의됩니다. 이 시기에 로마네스크는 비잔틴 예술과 이슬람 문화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는데, 이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클뤼니 III 수도원 교회입니다. 로마네스크 예술이 서서히 완성단계에 접어들던 시기와 흐름을 같이한 것이죠. 같은 시기에 지어진 시토회 수도원 역시 새로우면서 정제되고 간소해진 건축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클뤼니 III 수도원 교회,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보다 컸다는 교회 건물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불타 없어지고 종탑 하나만 남았습니다. 오른쪽은 클뤼니 수도원의 오늘날 모습입니다.
청빈한 수도 생활을 주창한 시토회 수도원 회랑, 영성에 입각한 검소하고도 소박한 절제미가 빛을 발합니다.


중세시대에 벌어진 대규모 종교 현상 가운데 하나는 성인들의 무덤들과 성골함들을 찾아다니는 순례가 빈번해졌다는 점입니다. 특히 기적이 일어난 곳은 더 많은 순례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성모마리아와 관련된 성소들 역시 순례자들로 붐비기는 마찬가지였죠. 이 모든 교회들이 순례자들에게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난 성소로 명성을 쌓아갔습니다.


서양에서는 역시 로마가 대다수의 순례자들이 찾는 성지중의 성지였습니다. 그러나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순례지에 일대 변화가 일어납니다. 순례자들이 에스파냐로 향하면서 프랑스에 4개의 순례길이 새로 생겨나게 된 것이죠. 이 길들을 통하여 프랑스를 출발한 순례자들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갔습니다.


콤포스텔라로 나있는 길이 바로 이들 ‘프랑스인들의 길’이라 불리는 카미노 프랑세(Camino francés)입니다. 명성 높은 교회들을 관통하는 넷으로 나뉜 길들은 성지순례자들을 위한 안내책자를 다시 수정해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순례객들로 들끓었습니다.


툴루즈의 생 세흐냉(Saint-Sernin) 성당의 야고보, 프랑스.


순례자들을 위한 안내책자 가운데 가장 정확하고도 완벽한 안내서 한 권이 1139년부터 콤포스텔라 대성당 고문서보관실에 소장되어있는 「칼릭스티누스 수사본(Codex Calixtinus)」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를 가리켜 흔히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안내서」라 일컫습니다. 안내서에는 콤포스텔라로 인도하는 네 개의 길들과 함께 길들에 얽힌 모든 전설이 성지 순례자들의 관점에서 상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네 개의 길 중 하나가 파리를 출발하여 투르(Tours)를 지나는 투호넨시 길(via Turonensis)입니다. 다른 하나는 레모비센시 길(via Lemovicensis)이라 불리는 베즐레(Vézelay)를 출발하여 리모쥬(Limoges)를 거쳐가는 길이죠. 세 번째 길은 포디엔시 길(via Podiensis)이라 불리는 르 퓌 앙 블래(Le Puy-en-Velay)에서 시작하는 길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길은 톨로사나 길(via Tolosana)이라 불리는데, 아흘르(Arles)와 툴루즈(Toulouse)를 거쳐 가는 길입니다.


파란색 선으로 그려진 4개의 순례길들은 모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하고 있습니다.


부차적인 순례지에 불과하던 곳들이 네 방향으로 난 길들을 따라 중요한 성지로 떠오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순례자들이 걸어가는 길들에 자리한 교회들은 마치 그 지역의 상징적인 건축물들처럼 모두가 다 회화 장식과 조각, 그리고 새로운 기술의 독창성에 입각하여 지어진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가는 길마다 순례자들이 운집하고 더해 간혹 막대한 기부금들이 쏟아져 들어온 덕에 세간에 소문난 교회들은 건물을 더욱 크고 넓게 확장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났음은 물론, 더 아름다운 장식으로 교회를 꾸밀 수가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베즐레의 막달라 마리아 성당과 르 퓌 앙 블래의 성모 마리아(노트르담) 대성당은 각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한 두 갈래 길의 시발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르 퓌 앙 블래(Le Puy-en-Velay) 대성당, 프랑스.


베즐레는 막달라 마리아 성골함이라고 추정된 성물함 덕에 11세기 초부터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입니다. 프로방스 지방에도 성녀 막달라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소가 있기는 하지만, 순례자들은 베즐레로 모여들었습니다.


베즐레(Vézelay) 막달라 마리아 대성당, 프랑스.


성당 공사는 1120년에 시작되었죠. 어마어마한 내부를 자랑하는 건물은 천장까지의 높이가 18.5미터에 달했습니다. 특별석뿐 아니라 중간 높이에 아케이드도 갖추지 않은 교회 내부는 아득한 높이로 건물 전체가 수직적 상승을 하는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바질리크 양식으로 지어진 베즐레 성녀 막달라 마리아 대성당 중앙 회중석, 1120-1140년.


교회 내부의 양쪽 어깨에 해당하는 측랑들까지 모두 합한 폭은 총 23미터에 이릅니다. 기둥들 사이 3개의 공간으로 분할된 정문 현관은 그 앞에 펼쳐진 회중석만큼이나 넓죠. 동쪽에 널찍한 후진이 나있는데, 열려있는 후진 회랑 안쪽으로 5개의 둥근 소제단들과 4개의 정사각형 작은 제단들이 자리 잡았습니다.


베즐레 성녀 막달라 마리아 대성당 정문 현관에서 제단 쪽을 바라본 모습.


건물 밑에는 지하교회가 들어섰습니다. 건축가는 교회내부 중앙 회중석 전체를 세로로 내진 깊숙이까지 통 형 천장들로 덮었습니다. 그럼으로써 회중석에 빛을 끌어들일 수 있는 커다란 창문들을 내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높이 솟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 들어선 각각의 벽면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아치 아래쪽에 창문을 낸 겁니다.

 

<신비한 방아>, 베즐레(Vézelay) 바질리크 대성당 중앙 회중석 기둥머리 장식, 1120-1140년경, 프랑스.


기둥머리 장식을 살펴보면 모세가 방아 안에다 밀 알갱이를 쏟아 넣고 바울은 그 밑에서 포대에다가 밀가루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영성을 양식에 비유한 상징에 해당합니다. 성서 주석학자에 대한 비유(알레고리)이기도 합니다. 밀 알갱이를 밀가루로 변환시키는 방아는 결국 구약은 신약으로 이어져 빛을 발하게 된다는 해석으로 신자들에게 건네지는 새로운 만나(밀떡)에 대한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즐레(Vézelay)는 3차 십자군 원정의 출발지였을만큼 영성 깊은 마을입니다. 언덕 위에 세워진 성녀 막달라 마리아 대성당은 바질리크 양식에 기초한 대표적인 건축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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