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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흘뢰흐

몽생미셸 가는 길 254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코탕탱 반도의 바흐흘뢰흐(Barfleur). 노르망디 관광청 홈페이지 화면.



바다를 향한 꿈은 멀쩡히 달리던 길을 버리고 다시 차의 방향을 바닷길로 변경하게 만든다. 거기엔 마치 오래된 꿈이 서려 있다는 듯이 머뭇거림 없이 한적한 코탕탱 반도의 바람길로 나선다.


몇 천 몇 만 년을 바람이 불었다 싶다. 그 오래된 풍화작용에 삭은 이야기들을 건져 내기도 쉽지 않다. 전설일 수도, 신화가 되었을 수도, 한낱 역사적 사건에 지나지 않을 잊힌 이야기일 수도 있는 그 이야기들을 다시 꺼내본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만은 사람 사는 동네이기엔 너무 많은 이야기를 지닌 마을을 돌아보기로 작정한 이상 불현듯 자동차의 방향을 트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Barfleur 6.jpg 뜻밖의 목적지가 된 코탕탱 반도의 바닷가 마을 바흐흘뢰흐(Barfleur).


다큐멘터리 속을 천천히 걸어 들어가 봐도 주민수가 500명을 조금 넘는 이 조그만 동네를 찾아가는 속내는 누구에게도 들킬 일 없는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겠다.


동네엔 등대가 있고, 천 년 전에 세워진 교회가 있고, 버려진 수도원이 있고, 우리네 주민 센터보다 작은 시청사가 있고, 조난당한 배를 구조하는 구조대 본부가 있고, 약국이 있고, 동네 주민들이 드나드는 신문 잡지 등속을 파는 가게가 있고, 우체국이 있고, 미장원이 있고, 갤러리가 있고, 선물가게가 있고, 빵집이 둘씩이나 되고, 교차로(까르푸) 슈퍼가 있고, 자전거 대리점이 있고, 카페와 몇 개의 식당들이 바닷가에 줄지어 들어선 풍경.


2019년 유월, 전설 속의 작은 포구 바흐흘뢰흐(Barfleur)를 화첩에 담다. © 오래된 타자기


사소한 동네 풍경은 그러나 천 년 전에 이 동네 포구가 영국과 바닷길로 이어진 최대의 항구였음을 은닉하고 있음은 묵은지처럼 꺼내들수록 눅진한 이야깃거리에 자꾸만 입맛을 다시게 된다.


홍어 한 점과 돼지고기 한 점 그리고 막걸리가 놓인 테이블에 차려진 등댓불이 밝힌 동네의 깊고 푸른 밤길을 향해 걸어가는 한낮의 산책이었으면 좋겠다.


크락코 등대에서 바라본 바흐흘뢰흐, 코할린과 레오 사진.


길가의 구릉길엔 미모사가 피어 있다. 노란 꽃이 유월의 햇빛에 바짝 타들어가는 모양새다. 사진을 찍고 싶어도 갓길이 없는 시골길이어서 눈으로만 흘긋거린다.


점심 식당 <파노라마>에서 바라본 바닷가 풍경.


한참을 구릉길을 달려 도착한 포구엔 어느 때인가부터 인기척이 끊긴 듯 조용하기만 하다. 대낮부터 카페의 테이블에 앉아 한담을 나누면서 술잔을 기울이는 몇 명의 사내만이 젊지 않은 동양인 부부를 흘긋거리는 동네의 거리 풍경은 전혀 이상할 것도 없다. 눈이 마주치면 살짝 고개를 수그리고 ‘봉쥬’하면 그만, 그러면 사내들도 늘 그랬다는 듯이 그때까지 나누던 이야기의 끝자락을 다시 이어 갈 것이다.


화제는 바람의 속도에 관한, 환절기 독감에 관한, 아니면 동네 누가 죽었다는 이야기일까, 바람 부는 바다로 나아간 어느 누가 풍랑을 만나 좌초해서 구조대가 달려갔다는 이야기일까, 물가가 올라 살기 어렵다는 이야기일까, 시장이 영 마을을 위해 일하는 것 같지 않다는 불만일까, 신문에 난 기삿거리일까, 성당을 향해 가다 할머니가 넘어졌다는 안타까움일까, 복권을 긁었는데 꽝 났다는 아쉬움일까, 집 안의 수도가 터져 수리를 해야 하는 돌발스런 당혹감일까, 연금이 제때에 나오려면 몇 년은 더 일해야 할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일까, 일상의 자잘한 이야기들이 속내에서 터져 나오는 구구한 사연에 뒤섞여 묵진한 삶의 정체 모를 이야기로 변하고 마는 한낮의 한담이 테이블마다 꽃 피는 유월, 동네는 아무리 둘러봐도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이른 철에 수국꽃이 피었다. 제라늄도 활짝 피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포구를 장식하고 있는 여름꽃들이 제법 선선한 오후를 환히 열어가고, 한적한 길 위의 허공을 날고 있는 갈매기들마저 낯선 사람조차 반가운지 바다 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찐득한 소금기마저 섞인 까악까악 대는 울음을 토해낸다.


기욤과 마틸드처럼 등대도 녹색, 붉은색 2개다. 노르망디 관광청 홈페이지 화면.


순간 여행은 축복처럼 나그네의 피곤한 발걸음에 덕지덕지 묻은 간밤의 불면의 먼지까지 털어준다. 내딛는 걸음이 그래서 가벼워진다. 사진 한 장으로 남을 포구에서, 물 빠진 갯벌에 기우뚱 얹혀 있듯 위태롭게 서있는 배들에게서, 물 빠진 하구의 비릿한 내음 간간이 코끝을 스치는 해안에서, 서로 어깨를 맞댄 묵직한 돌집들의 어울림에서, 창마다 레이스 수놓아진 커튼이 내려진 한낮의 열기에서, 습지로부터 막 날아오른 철새들이 또 어딘가로 날아가며 비워 놓은 허공에서 천 년의 아득한 공기가 구름 되어 몰려온다.


폭풍전야의 바흐흘뢰흐 포구, 다니엘 뒤마(Danielle Dumas) 사진.


바흐흘뢰흐(Barfleur)가 프랑스에서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마을 가운데 한 곳으로 선정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코탕탱 반도에서 제일 작다는 이 동네가 ‘발 드 셰흐(Val de Saire)의 진주’로 불리는 것도 절대 우연이 아니다. 마을 이름인 바흐흘뢰흐의 흘뢰흐(fleur)는 고대 노르드어 흘로드(floth : ‘강’이란 뜻)에서 유래했다.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포구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그렇듯 마을을 이름하였을 것이다.


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마을을 찾은 영국의 세인트 미카엘스 마운틴을 출발한 순례자들은 포구에 발을 딛자마자 순례를 시작하여 몽생미셸에서 그 대미를 장식한다. 오늘날에도 ‘영국인들의 길(Chemin aux Anglais)’ 또는 ‘천국의 길(Chemin de Paradis)’이라 불리는 순례자의 길은 그처럼 바흐흘뢰흐에서 시작한다.


마을은 중세 시대에 꽤 번성한 마을이었긴 하나 남아있는 중세풍의 건물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전쟁 탓인지, 격동기마다 겪은 사회적 혼란 탓인지, 옆의 셰르부르 대도시에 묻혀 큰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탓인지 마을은 쪼그라질 대로 쪼그라들어 근세에 지은 돌 건물들만 그것도 셀 수 있을 만큼만 로마네스크 시대에 처음으로 세워진 성 니콜라 성당 곁에 얌전히 붙어있다.


미묘한 음영으로 서있는 화강암으로 지어진 건물들의 일정한 어울림, 푸르스름한 편암으로 덮인 지붕의 리듬은 마치 포구를 향해 도망치는 아름다운 소실점을 이룬다. 언뜻언뜻 보이는 푸르스름한 편암에 회색 슬레이트 지붕 그리고 나무 서까래를 이용한 집들이 보일 듯 말 듯 끼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광채로 눈길을 끄는 것은 변화무쌍한 색조로 빛나는 바다다.


저녁노을에 잠긴 바흐흘뢰흐 포구


해변 항구는 그처럼 계절에 따라 끊임없는 빛의 색조로 말미암아, 조수로 말미암아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을 다 지켜보자면 이런 마을에 한 1년쯤 살아야 할 듯싶다. 긴 겨울이 찾아오면 방금 잡은 생선으로 만든 생선 수프에 바짝 구운 빵을 적셔 먹으며 창가 테이블에 오래도록 머물러 방파제를 때리는 성난 파도를 지켜봐도 좋을 듯싶다.


노르망디 공작 기욤(윌리엄)의 시대에 만든 항구는 전혀 찾아볼 길이 없다. 현재의 항구는 19세기부터 단계적으로 지어진 것이라고 마을을 소개하는 관광 안내 책자는 묻지도 않은 말을 길게 설명하고 나선다. 나 같은 이들은 이미 마을의 내력을 알고 있는 터라 저 아득한 천 년 전 기욤의 막내아들 노르망디 공작이자 영국 국왕이었던 앙리(헨리) 1세가 영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탄 범선이 암초를 들이받아 좌초했다는 역사적 사건만이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을 크락코(Cracko) 등대가 묵묵히 증언해 주고 있음을 눈치챌 뿐이다.




성(聖) 니콜라 천주교회



크락코 등대에서 바라본 성 니콜라 성당.


바위가 많은 곶에 장엄하게 우뚝 자리 잡고 있는 성 니콜라(Saint Nicolas) 성당은 해변 묘지에 둘러싸인 채 바람의 세기와 파도의 높이를 눈여겨 감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월의 바람과 파도를 이겨낸 성당은 짓는 데만 정확히 223년 이상이 걸렸으며, 원래는 코탕탱 지역에서 목조로 지은 최초의 종교 건축물이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6세기에 이곳 앞바다에서 타고 있던 배가 조난을 당해 우연히 마을에 발을 디딘 생 롱패흐(Saint Romphaire)는 이 지역을 복음화하기에 이르고, 바흐흘뢰흐의 첫 번째 교구 사제가 되었으며, 꾸땅스(Coutances)에서 주교로서의 삶을 마감한다.


공작 시대인 11세기에 이르러 바흐흘뢰흐엔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가 들어서고, 1346년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의 군대는 교회에 불을 지르고 파괴하는 짓을 거리낌 없이 자행한다. 백년전쟁의 여파로 심각하게 훼손된 탓에 여러 번 복원하면서 재건한 이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교 건축물은 16세기에 이르러 이른바 구교도와 신교도가 서로 맞선 종교 전쟁의 여파로 또 한차례 참화를 입는 사정을 지독하게 감내해야만 했다.


미사 집전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던 이곳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교회의 생 콤 기도소였으며, 그 후 교구 교회가 되었다. 인구는 1626년에 약 500명으로 증가했으나 너무 황폐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를 이후 2세기 이상 지속될 새로운 교회로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1630년에서 1637년 사이에 합창단과 성소가 세워졌다. 그런 다음 1649년에서 1653년 사이에 탑의 4개의 교각과 트랑셉(transept) 좌우 벽이 들어섰다. 1695년 종탑과 함께 트랑셉의 좌우 측 회랑(翼廊)이 완공되고, 재정 자원이 부족했던지 건물 공사는 거기에서 멈췄다. 교회 건축물은 서쪽 부분에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을 뿐, 교회에는 19세기까지 본당이 없었다고 교회의 내력을 전하는 기록물은 목청을 높인다.


1827년 들어와 바흐흘뢰흐 교구 사제로 임명된 앙투아르(Abbé Anthouard)가 그때까지 모은 개인 재산을 모두 다 털어 기꺼이 봉헌한 덕에 교회는 마침내 완성을 볼 수 있었다.


1839년에서 1844년에 팔각형 돔으로 둘러싸인 축 방향 내진으로 완성된 본당이 건설되었다. 그 후 성당에서는 미사가 집전되고 성찬식도 거행되기에 이르렀다.


바흐흘뢰흐 성 니콜라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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