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255화
[대문 사진] 바흐흘뢰흐 앞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나 길을 잃은 수많은 배들을 안전하게 인도하는 갸뜨빌(Gatteville) 등대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높은 망루를 자랑한다. 자비에 라슈노 사진.
노르망디 공작이자 영국 국왕이었던 기욤(윌리엄)의 시대에 바흐흘뢰흐가 중요한 항구 구실을 했던 것은 이곳이 영국과 가까운 항구였기 때문이다. 기욤은 영국으로 출발할 때는 뚜끄 항에서 출발했지만, 영국서 올 때는 항상 바흐흘뢰흐 항구를 이용했다.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던 바흐흘뢰흐는 기욤 이후에도 건재했다. 역사적 패착은 기욤의 막내아들 앙리 보클레흐(기욤이 죽고 난 뒤엔 형제들을 물리치고 앙리 1세로 즉위한다)가 바흐흘뢰흐 항구에서 배를 타고 영국을 향하다 마을 바로 앞바다에서 암초에 부딪혀 난파를 당하여 자식들을 다 잃었다는 데 있다. 왕국의 후계자들이 다 사라진 노르망디 왕국은 이후에 급격히 기울고 결국 프랑스 왕국에 편입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역사서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긴박하게 타전한다.
하얀 범선의 참혹한 난파
1120년 11월 25일 노르망디 공작이자 영국 국왕인 앙리(헨리 1세)는 영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궁정인들과 바흐흘뢰흐 항구에서 배에 올랐다. 국왕의 두 아들은 하얀 범선(Blanche Nef)이라 불린 다른 배에 승선했다.
이 무슨 축제라니, 탑승자들은 모두 술에 취했고 그래서 탑승도 지연됐다. 이윽고 밤이 찾아왔다. 젊은 왕자들은 토마스 선장에게 빨리 국왕이 탄 배를 따라잡으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선장은 좀 더 짧은 뱃길을 택해 곧장 북쪽을 향해 뱃머리를 돌려 바흐흘뢰흐 평탄한 바닷가로 배를 몰았다.
이곳은 오늘날 갸뜨빌(Gatteville) 등대가 서있는 곳이다. 이곳은 뭍이 드러날 정도로 수면이 낮고 곳곳에 암초들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하얀 범선은 암초 하나를 들이받고 소머리 장식을 한 용골이 부러지면서 박살이 나고 말았다. 겨우 두 명만이 물 위에 떠 있는 부러진 돛대를 잡는 데 성공했다.
두 명의 생존자는 루앙 세느 강가에서 푸줏간을 하는 베홀과 애글에 살고 있는 질베르의 젊은 아들 고드흐루아였다. 베홀은 훗날 중세사가 오흐데리크 비탈에게 이 사건의 진상을 이야기해 주기를, 물 위로 머리를 쳐든 살아남은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는데 그게 바로 토마스 선장이었다는 것이다.
“왕세자는 어떻게 되었나?” 물 위에 뜬 채 선장은 살아남은 두 사람에게 물었다. “왕세자는 찾을 수 없었고, 왕세자 형제나 그 어느 누구도 발견된 사람은 없습니다.” 파손된 배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두 사람이 선장에게 대답했다.
“이 무슨 재앙이람!” 토마스는 절규하면서 바닷물 속으로 사라져 갔다. 애글에 사는 고드흐루아 역시 몸이 얼어붙을 듯이 차가운 바닷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말았다. 오직 베홀만이 어부들에 의해 구조되었다.
국왕은 동승한 이들 가운데 3백여 명을 잃어버렸다. 그 중에는 공주 한 명과 두 명의 왕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왕위를 계승할 기욤 아들랭과 리샤르였다. “(…) 살아서 더 무엇 하리. 왕은 어이없다는 듯이 실없는 웃음만 지었다.”라고 중세사가 바스는 그때의 상황을 전한다.
하얀 범선의 재앙은 두 왕국을 이어갈 정통 후계자로서의 왕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그 심각성을 더했다. 캉에 있는 로베르는 적자가 아니라 서출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앙리는 브라방 공작의 딸인 아델리즈와 재혼했다.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둘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1127년 왕국의 모든 귀족들은 앙리 1세의 딸인 마틸드 공주에게 충성을 서약해야만 했다. 얼마 있다가 마틸드는 과부가 되었다. 서약은 1131년 갱신되었다.
1135년 12월 1일 마침내 앙리 1세가 숨을 거뒀다. 손자인 앙리(헨리) 플랑타쥬네(플랜태저넷)가 태어난 지 2년째 되는 때였다. 손자 앙리는 마틸드가 재혼한 제오프루아 당쥬의 아들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왕위 계승은 국왕이 죽은 뒤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앞으로 왕국과 공국은 긴 세월 동안 전쟁을 거듭하면서 헤어 나올 수 없는 혼란 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