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257화
[대문 사진] 생로(Saint-Lô), © 오래된 타자기
2025년 1월 새해 벽두에 눈 대신 비가 내린다. 하루 종일 내릴 기세다.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자니 기억 속의 생로는 참 맑은 날씨였다는 생각이 든다. 에어컨을 틀지 않으면 비좁은 자동차의 운전석이나 조수석에서 아내와 나, 두 사람 다 옴짝달싹 못할 지경에 비지땀이 온몸을 적셔갈 화창한 여름날씨이기만 했다.
길을 가다 시원한 그늘에서 한 번쯤 쉬련만 나무 그늘을 찾을 새도 없이 생트 메흐 에글리즈에서 생로까지 34킬로미터의 길을 달렸다. 망슈 지역의 주도(州都),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된 쓰라린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 폐허가 된 도시는 전쟁이 끝난 뒤인 19년 동안 주민 모두의 공동의 노력으로 겨우 회생할 수 있었다.
폐허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폐허를 바라보는 주민의 시선은 뜨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텅 빈 도시에서의 삶의 자잘한 추억은 감히 끼어들 엄두조차 못 내는 절체절명의 암담함밖에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내일을 살 것인지, 어떻게 앞으로의 삶을 꾸려갈 것인지, 무슨 방법으로 자식들을 키우고 먹여 살릴 것인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처참한 전쟁의 폐허만을 망연히 바라만 보았을 피난민의 심정을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두 사람이,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우리가 과연 실감할 수 있을까? 그렇듯 생경한 도시에 내딛는 발걸음은 과연 무얼 의미하는 것인가?
폐허뿐인 성곽 도시를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걸어가기로 작정했다.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을 딛고 새로 일어선 도시에 감동하고 싶어서였다. 느낌만으론 새로운 도시일 수 없는 오래된 도시의 역사와 문화와 주민들이 일궈낸 서사들을 눈여겨 확인하고 싶었다. 하여 우리 두 사람도 그렇듯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일상의 폐허 한가운데에 쓰라린 상처뿐인, 매일매일 목을 조여 오는 부당한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 가고 싶었다. 온전히 맨 손으로, 맨 정신으로, 하나뿐인 맨 몸으로 새롭게 부딪히고 싶었다.
맞잡은 손의
따뜻함에 대한 기억
손에 잡힌 아내 손의 온기를 짐작한다. 온기가 희망이 되고 소망이 되고 꿈이 되는 순간에 목이 멘다.
이 힘 없이 흔들리는 초라함을, 이 한없이 들썩이는 망설임을, 이 안절부절못하는 초조함을, 이 한밤중에 불현듯 소스라치는 불안감을, 이 어설픈 막막함을, 이 뜻 모를 깊이로 가라앉아만 가는 암담함을 이겨내고 새로운 시작에 목마른 사람이 되고 싶다. 다시 되새기고 싶다! 모든 불안과 모든 막막함과 모든 암담함과 모든 초조함과 모든 망설임과 모든 석연찮음을 내던지고 내일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묵직한 발걸음이고 싶다.
카페에서 폐허이다시피 한 성당을 바라본다. 돌무더기로 변한 교회가 완전히 날아간 역사는 제쳐두고 전쟁의 아픈 기억으로 성당 한구석에 버려지듯 놓여있는 종(鐘)에게서 흔들림 없는 울림을 듣는다. 종을 매달 종탑이 없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일환으로 퍼부어진 연합군의 공습은 교회를 종탑과 함께 한 줌 돌먼지로 무너져 내려앉게 만들었다.
누가 저 종을 새로 지을 종탑에 매달 것인가? 하여 미사를 알릴 종을 매일 울릴 것인가? 울리지 않을 종소리는 허공의, 기억 속의 울림으로만 공명한다. 미국 작가 헤밍웨이는 “종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나”, 생전에 스페인 내전에 전투요원으로 참가한 작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종은, 내버려 둔 종은 더 이상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울리지 않는다.
중세의 기품을 자랑하던 성벽마저 허물어졌다. 주민 공동의 노력으로 다시 쌓은 성벽 위에 서면 되살아난 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뜨거운 햇살이 전쟁의 참화를 이겨내고 새롭게 재건할 수 있는 에너지였다면, 이 시원한 바람은 전쟁의 참상을 잊게 만든 위로였을 것이다. 나뭇잎의 흔들림이 생존에의 암담함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만들어준 유일한 원동력이었다면, 흔들리면서도 하늘 높은 키로 자라는 나무처럼 인간인 우리 역시 나날을 살아가면서 꿈을 키우고 꿈이 여무는 것을 지켜봐야만 한다는 사실에 목이 멨을 것이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결에서 그들, 생로의 주민들의 꿈을 읽는다. 아내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바람에게서 삶의 상처와 아픔과 고통과 번민의 순간을 읽어가는 것처럼. 그런 기억이 새로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이 여름 한복판을 향한 길목에서 잘 여문 꿈으로 익어 열매로 맺힐 것을 꿈꾼다.
소중한 한 줌의 꿈이 흙먼지가 되어 날릴지라도 바람에 날려 보내지 않을 의지가 있다면 성벽에 기댄 여행자의 몸뚱어리쯤이야 아랑곳할 게 못된다. 단지 꿈꾸고 걸어갈 길만이 떠오른다. 세상 끝까지 걸어가야만이 멈출 여정이 그려진다. 길 끝엔 해 지는 바다가, 해가 다시 떠오르는 바다가, 새들이 나는 허공 속에 몸담은 섬 하나가, 하늘을 찌를 듯이 허공을 향한 성 미카엘 천사장의 칼끝이, 도금된 첨탑 위에 이끼로 핀 세월의 더께가, 수도원 한 자락에 자리 잡은 천국의 뜨락이 자리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중세의 파괴와 재건의 되풀이 속에서 천 년을 이어간 기독교 문명에의 눈뜸이 읽힐 것이다. 목선을 타고 망망대해를 떠돌던 이들이 왕국을 건설하고 찬란한 로마 문명을 되새긴 천 년 역사의 새로운 문명을 건설한 현장마저 환히 떠오르면서 물밀져 오는 파도에 뒤섞인 기대와 희망에 벅찬 인류의 꿈들이 한없이 밀려와 가슴 한 복판에 차오르는 물살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 벅찬 감동만으로, 그 숙연한 믿음만으로, 그 뜨거운 열정만으로 바다 한복판에 자리한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만 있다면 여행의 끝이어도 좋다. 눈부신 순례의 마지막이어도 좋다. 내가 걸어온 익숙한 길과 새로 걸어갈 낯선 길이 교차하는 답사, 그 망설임의 끝이어도 좋다.
그 끝에서 잘 여문 꿈 하나 가슴에 간직하고 시린 바닷바람에 상처받은 영혼이어도 괜찮다. 익숙지 않은 시선이 머물지 못하고 방황하는 길들의 밤이 여물어 녹록지 않은 꿈으로 익어가는 어둠 속에서 스스로 밝힌 등불이어도 괜찮겠다.
이 짧지 않은 먼 여정이, 길디긴 아득함 뿐인 답사의 길이 푸르고 찬란한 고통으로 남을 상처여도 괜찮겠다. 어느 봄날 다시 피어날 소중한 기억의 책장 갈피마다 꽂힌 추억의 꽃 이파리여도 괜찮겠다.
아내의 손을 잡고 거닐던 기억의 부산한 하루의 인상을 담은 사진쯤으로, 내 걸어간 길의 흙먼지가 되어 바람결에 피어오르는 내 사랑하는 이의 깊은 한숨 속에 깃든 망설임뿐 일지라도 우리 걸어간 길의 뜻깊은 서사이기를 바라는 꿈이었으면 좋겠다. 오늘 이 써 내려가는 꿈마저 상처 난 아픔이어도, 저 하루 종일 내리는 비를 멈추게 만드는 유월의 찬란한 햇살이면 더없이 바랄 게 없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