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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레첼리나 May 26. 2024

라디오 천국

중, 고등학생 때 또래 친구들과는 달리 나는 김동률, 이소라, 윤상, 이적, 유희열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 두 살 터울의 조금은 성숙했던 언니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언니와 작은 침대를 같이 썼는데, 머리맡에 라디오와 공테이프가 있었다. 카세트라디오에 공테이프를 넣고 라디오에서 언니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언니는 소리를 지르며 빨간색 녹음 버튼을 눌렀다. 공개방송 라디오를 들을 때는, 사회자가 가수와 노래제목을 소개할 때 관객들의 환호성 소리가 들리면 어떤 노래인지도 모르고 녹음 버튼을 누르기도 했다. 이렇게 건진 주옥같은 노래들이 꽤 있었다. 물론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 테이프를 사서 듣기도 했지만, 라디오를 들으며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만든 우리만의 플레이리스트가 된 테이프들을 더 애정하고 아꼈다. 


독일 유학 전 돈을 모으기 위해 한 회사에서 잡다한 사무 업무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컴퓨터 앞에 앉아 단순 노동을 하는 업무라 라디오를 들으며 일하곤 했다. 아침에는 '오늘아침 이문세입니다.'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고, 점심을 먹고 살짝 피곤할 때는 '이소라의 오후의 발견'을 들으며 퇴근 시간만 되기를 기다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훌륭한 DJ들이 진행한 프로그램들을 생방송으로 들을 수 있었다니, 정말 행운이었던 것 같다. 청취자들의 사연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함께 고민해 주며 좋은 노래로 위로해 주는 DJ들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느새 라디오 애청자가 되어 있었다.


독일에 간 뒤, 한동안은 라디오의 존재를 잊고 살았다. 독일에는 벼룩시장이 주기적으로 열리는데, 어느 토요일 친구들과 집 근처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을 구경간 적이 있다. 거기에는 온갖 잡다한 것들, 오래된 것들이 있었다. 여기저기 구경하던 중 오래된 라디오 기기 하나가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단순 라디오만 되는 기기였다. 엔틱 한 브라운 색의 라디오였다. 나는 그 라디오를 파는 아저씨에게 이 기기가 작동이 되는지 물어보았다. 아저씨는 당연히 작동된다며 얼른 사라고 나를 부추겼다. 사실 벼룩시장에서 사는 전자 기기가 잘 작동될 거라는 기대를 하진 않았다. 그래도 인테리어용이라도 좋을 것 같아서, 또 가격도 저렴했기에 10유로에 그 라디오 기기를 구매했다. 집에서 라디오를 켰는데 작동이 안 된 건 아니었지만, 볼륨 조절이 힘들고 주파수를 힘들게 맞춰야만 작동이 됐다. 그날 후로 그 낡은 라디오가 나를 다시 라디오의 세계로 초대했다. 독일 라디오에서 DJ가 하는 말은 잘 못 알아들었지만, 라디오를 듣고 있으면 내가 이 독일이라는 사회에 일부가 된 것 같아 집에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틀어놓게 되었다.


한국에 사는 지금, 독일에서 산 그 낡은 라디오가 여전히 우리 집 부엌 선반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제는 라디오를 켜면 한국어가 들린다. 요즘은 예전만큼 사람들이 라디오를 듣지 않는 것 같다. 예전에는 라디오에서 신곡들이 많이 흘러나왔는데, 요즘에는 라디오에서 옛날 노래들이 많이 나오니, 라디오 청취자의 연령대가 높아진 것 같기도 하다. 회사 동료들은 라디오를 듣는 사람이 아직도 있냐며 라디오를 듣는 나를 신기하게 생각한다. 음악만 듣고 싶을 때는 내 플레이리스트를 유튜브에서 듣기도 한다. 그래도 라디오만이 가진 그 아날로그적인 매력에 매료되어 라디오를 더 선호한다. 유튜브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 외에 내가 좋아할 법한 음악들을 추천해 준다. 하지만 라디오는 모든 청취자들의 취향을 알려준다. 라디오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나 말고도 이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동지를 만난 것처럼 설레며 노래를 듣는다. 또는 내가 좋아했지만 잊고 있었던 노래가 나오면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노래를 들으며 울컥하기도 한다. 모르는 노래들 중 좋은 노래를 발견할 때의 희열감도 있다. 


오랫동안 나는 독일에 살았고, 다시 한국에 사는 삶이 쉽지는 않다. 10년 동안 나도 변했고, 한국은 더 많이 변했다. 가끔 동료들이 하는 얘기에 공감이 안되기도 하고, 내가 한국을 잘 모르는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도 있다. 나의 모국이지만 낯설게 느껴진다. 그래도 라디오가 나에게 많은 위안이 된다. 유일하게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라디오를 통해 나는 지금의 한국을 듣게 되고, 사람들 사는 이야기도 듣게 된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는 여전히 사람 사는 게 똑같구나 라며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런 라디오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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