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내에 작은 도서관이 있었다. 수능공부로 지쳐있을 때나 나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할 때 도서관에 가곤 했다. 나는 책을 많이 읽고 자란 아이는 아니었다. 책을 좋아했던 아빠의 영향으로 집에 책이 무수히 많았지만, 이상하게 책에 손이 가지 않았다. 책보다는 밖에서 친구들과 몸을 움직여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반면 언니는 어렸을 때는 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책을 좋아해서였는지 언니는 공부를 참 잘했다. 그런 언니와 비교당한다는 열등감에 나는 오히려 책을 더 멀리했다. 그렇게 책과는 거리가 먼 나였는데, 하필 수능 공부를 해야 했던 그때, 왜 그렇게 도서관에 가는 것을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책이 꽂혀 있는 책장 앞을 거니는 게 좋았고, 책의 제목을 훑어보는 게 좋았다. 내용도 보지 않으면서 책을 하나 꺼내 몇 장 넘기고 다시 꽂는 그 행위를 하는 내가 멋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도서관이 주는 분위기와 아늑함이 내가 독서에 취미를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교 내에 있었던 도서관은 고등학교 도서관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거대했다. 그때는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책장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책들을 발견하는 일은 마치 여행과 같다고 생각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명소를 찾아가 아름다운 것을 감상하며 느끼고, 또 새로운 것을 찾아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그런 여행처럼 말이다. 도서관에서 돌아다니며 언제가 한번 들어본 고전을 발견해서 읽기도 하고, 단순히 제목에 이끌려 본 책이 나의 애장도서가 되기도 했다. 당시에는 주로 쉽게 읽히는 단편 소설이나, 여행 에세이들을 많이 읽었는데, 그런 책들을 읽으며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게 되었다.
독일에서 유학했을 때, 내가 제일 좋아하고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 역시 학교 도서관이었다. 예술 대학교여서 다른 학생들은 도서관보다는 아뜰리에에서 작업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어떤 작업을 해야 할지 몰라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그리고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 학교 생활의 대부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도서관에 있는 책들은 다 예술 관련 서적이라 독일어로 쓰여있음에도 작품 사진들이 많았기에 재밌게 보았다. 도서관과 책은 나의 유학생활의 전부였고, 심지어 내 졸업 작품의 주제이기도 했다. 그만큼 그곳을 사랑했다.
독일에서 직장생활을 했을 때는 퇴근 후 자기 전에 책을 읽기도 하고, 주말에는 근처 공원에 앉아 책을 읽기도 했다. 밖에서 책을 읽으면 오감을 다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피부에 닿는 바람, 나뭇잎 소리, 잔디 냄새, 사람들의 수다 소리와 책의 내용이 하나가 된다. 독일에서는 주로 고전들을 많이 읽었는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독일에서는 한국 책이 귀하다. 유학 후 귀국한 친구들의 책들을 물려받다 보니, 한국어로 된 책들 중 우연히 고전들이 많아서 읽게 된 것이다. 그중 독일 작가가 쓴 고전을 읽었을 때는 더 공감이 됐다. 책에 쓰인 지명에 가본 적이 있거나, 인물들의 성격을 묘사할 때는 그와 비슷한 내 독일 지인이 떠오르기도 했다. 책을 읽을 때 내 머릿속에 그림이 더 잘 그려졌다. 고전이 이렇게나 재밌는 책이었음을 처음 깨닫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책을 여러 권 천천히 읽는다. 밤에는 고전을 읽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내가 좋아하는 매거진을 읽는다. 틈틈이 내가 일하는 분야의 책을 읽기도 한다.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자기 전 고전을 읽는 시간이다. 자연스럽게 책 속의 주인공에게 나를 대입하게 된다. 긴 호흡을 가지고 읽으니 주인공에 대한 애착도 커진다. 완독 후에는 다음번 책을 고르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요즘에는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다독보다는 좋은 책을 깊게 읽고 싶다. 어떤 날은 글자만 읽으며 책장은 넘기는데,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머릿속에 하나도 기억이 안 날 때도 있다. 그런 날은 과감히 책을 덮는다. 책에 빠져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독서가 내 삶의 오랜 시간 취미로 자리 잡았다. 나는 책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