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나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우리 집은 다른 집보다 유독 책이 많았음에도, 책에 손이 가지 않았다. 책의 흥미를 느끼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주 재미있게 읽은 책들이 몇 권 있었다. 고등학교 때 집에 아주 오래된 '파우스트'라는 책이 있었다. 그 책을 왜 읽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책이 오래되고 특이해 보여 손이 갔던 것 같다. 그 책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글이 세로로 쓰여있었다. 처음에는 읽기 어려웠지만 내용이 재밌어 세로 글이라는 장애에도 집중하며 아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파우스트'라는 책이 고전인 줄도 몰랐다. 읽으면서 지금 까지 읽었던 일반 소설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있었다. 내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말을 설명할 수 없는, 생각도 정리할 수 없는 인간의 깊은 본성을 다루고 있었다. 이야기도 물론 재미있었지만, 소설 속 인물이 하는 생각들, 행동들의 더 집중하며 책을 읽어 내려갔다. 지금은 읽은 지 하도 오래돼서 내용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문득 파우스트가 생각이 난다. 내 내면에 무언가 깊게 자리 잡은 느낌이 든다.
성인이 된 후로 자연스레 책이 좋아졌다. 도서관에 가는 게 좋았고, 책을 통해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아 책의 흥미를 느끼게 됐다. 책을 읽을수록 내가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읽었던 책은 주로 여행 에세이, 자기 계발, 로맨스 소설이었다. 감성적인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독일에 온 후로 한국어로 된 책을 읽을 기회가 거의 없어 책을 많이 읽지 못했다. 한국어로 된 책이 귀해 아는 한인들의 집에 가서 한국책이 있으면 취향 가리지 않고 빌려와서 읽곤 했었다. 방학 때 한국에 방문할 때마다 교보문고에서 책을 10권 이상씩 사 오기도 했다. 졸업 후 남편이 유학하고 있는 독일에 다른 도시로 이사를 했다. 남편은 책이 정말 많았다. 주로 독일어로 된 전공 서적들이었지만 한국어로 된 오래된 고전들이 많이 있었다. 남편도 방학 때 한국에 방문했을 때 집에 있던 자기 책들을 다 가지고 왔었다고 했다. 나는 직장 생활을 하며 남는 시간에 한국어로 된 책을 보고 싶었다. 집에 있는 책이 고전뿐이었으니 원하든 원하지 않든 책을 읽으려면 고전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집에 여러 고전들 중에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내가 독일에 있기도 했고, 예전에 헤르만 헤세가 일했던 튀빙겐의 한 서점도 방문한 기억이 있어 그의 책을 읽기로 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라는 책을 독일에 오기 전 읽은 적이 있다. 독일에 갈 생각에 독일과 관련된 책들이 읽고 싶어 추천받은 책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당시에 내가 읽기에는 재미가 없었다. 내용도 어려웠고, 책 한 장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이렇게 재미없는 책이 어떻게 고전인지, 왜 필독서인지 이해가 안 되었지만 꾸역꾸역 읽었다. 그 뒤로 헤르만 헤세에 대한 그리고 고전에 대한 선입견이 생겼다. 고전은 어렵고 재미없는 거야라고 나 스스로 생각했다. 옛 생각에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은 것이 조금은 두려웠지만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첫 장부터 너무 재미있는 거다. 나이가 들어서였는지, 내가 독일에 있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책 속의 인물들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장면들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다. 골드문트가 있던 수도원, 수도원에서 도망치는 모습, 숲 속에서 생활하는 풍경, 골드문트가 조각을 했던 어느 시골 마을, 성단, 조각상, 작업장들이 세세하게 다 그려졌다. 아무래도 내가 독일에 있으니, 그리고 유럽에 여러 도시를 여행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책 속에 있는 글들이 살아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읽고 덮는 순간 이루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아주 먼 옛날을 여행하고 온 기분이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게서 한동안 빠져나올 수 없다. 나의 삶은 골드문트의 삶인지, 나르치스의 삶인지 생각하게 되었고, 그 두 인물이 살았던 삶, 서로를 향한 끌림, 애틋함 그리고 그리움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영화보다 더 생생한 장면들이 내 머릿속에 있었다.
그 뒤로 나는 고적의 매력에 빠졌다. 분노의 포도, 슬픔이여 안녕, 삶의 한가운데에, 독일인의 사랑, 좁은 문, 1984 등등 고전을 읽으며 인간에 대해, 삶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의 삶에서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앞으로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여러 가지 고민이 될 때 고전에서 읽었던 많은 인물들을 떠올리며 도움을 받기도 했다. 현대 소설도 읽고 싶지만 아직 못 읽어 본 고전 소설이 너무나 많다. 훌륭한 현대 소설뿐 아니라 영화나 예술의 모티브가 되는 것의 많은 것들이 고전에 있다. 그래서 고전을 읽을 때마다 내가 좋아했던 감독이 그리고 영화가 여기서 영감을 받은 거구나, 내가 많이 들었던 단어나 인물 이름이 여기서 처음 나온 거구나라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다. 앞으로 만나게 될 많은 고전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