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폴로하스 Polohath Dec 28. 2020

책을 다루는 기쁨

책을 읽는 기쁨만큼이나 책을 다루는 기쁨도 크다. 요즘은 도서관을 주로 이용하고 중고 서적을 사기 때문에 책 다루기에 대한 집념을 많이 내려놓았지만 그래도 변치 않는 나만의 룰이 있다.


1. 책장의 책은 키 순서대로 꽂는다.

2. 전집이나 세트는 책 번호대로 꽂는다.

3. 한국어 책과 원서를 구분하여 꽂는다.

4. 책장이나 표지를 훼손하지 않는다.

5. 줄 긋거나 낙서할 수 없다.

6. 책장을 접을 수 없다.

7. 책장 넘기면서 침을 묻히거나 모서리 부분이 접히거나 말리게 할 수 없다.

8. 가방에 넣거나 뺄 때 표지가 꺾일 수 없다.

9. 다시 읽을 계획이나 소장할 가치가 있는 책을 제외한 나머지 책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바로바로 정리한다.



                                                                                                                    

온라인 중고 서점에서 주문한 아들들 책이 도착했다. 택배 포함 3만 원. 지난번보다 권수도 더 많고 책 상태도 좋다. 새 책이 들어왔으니 읽은 책은 정리해야 한다. 책을 포함한 모든 물건은 헌 것이 자리를 비워줬을 때만 새 것을 들이는 것이 원칙이다.         

                                     

아들들 몰래 정리할 책을 골라 도서관으로 향했다. 미리 전화해서 기부가 가능하다는 답변도 들었다. 아이들 책은 하드커버라 무거워서 고작 2분 거리 걷는데도 어깨가 아팠다.                                              

                                                                                                                                                                

책을 사고 만지고 책장에 꽂고 솎아내고 정리하고 기부하고 도서관에 앉아 책 냄새를 맡고 서점에 서서 신간을 구경하는 일, 책을 다루는 이 모든 과정은 책 읽는 기쁨만큼이나 큰 기쁨이다. 집 근처에 작지만 걸어갈 수 있는 도서관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책을 기부하며 이 글을 썼을 당시에만 해도 도서관 출입이 자유로웠다는 것이 코로나가 창궐한 요즘에서야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새삼 느낀다.



                                                                                                                                                             

책을 정리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솎아내는 것도 좋아하는데 그렇다고 책을 함부로 버리는 것은 싫다. 그러다 보니 늘 기부할 곳을 찾는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학교 아파트에서 이사 나올 때 소장하고 있던 한국 책들의 처분이 난감했다. 학교 도서관에 기부를 문의했더니 우리 학교 전공에 없는 언어의 책은 캠퍼스 도서관에 비치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급한 대로 한국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기로 했는데 이게 또 내 입장에서는 충격이었다. 대도시도 아니었고 한국 사람도 별로 없는 곳이라 한국 책을 구하려면 상당히 비싼 배송료를 감당하며 한국에서 받아야만 했고 나도 몇 년간 그렇게 받아서 읽고 간직한 책들이었다. 그런 귀한 책들을 나눠준다는데 생각보다 반응들이 없었다. 한 나라의 지성이라는 대학생들의 순수문학 독서량이 이 정도로 적을 줄이야. 내 딴에는 정말 충격이었다.


해외출장이 많은 업무를 하게 되면서부터는 솎아낼 책이 모이면 캐리어에 싣고 출장을 갔다. 현지 한인 교회를 찾아가 한국 책을 기부하겠다고 하면 대부분 흔쾌히 받아 주었다. 해외에 있는 한인 교회는 종교 단체로서의 역할만큼이나 한인 이민자들의 교류 장소로서의 역할이 크고 그만큼 한국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중 특히 기억에 남는 교회는 쿠웨이트에 있었던 한인 교회다. 다른 나라의 이민자들보다 훨씬 큰 문화 차이를 경험하며 살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 그만큼 한국의 모든 것을 더 반가워할 것 같다는 생각에 책을 전달하면서 나 혼자 조금 찡했었다.                                              



                                                                                                                                                         

위에 옮겨온 글에서는 나의 책장 정리가 꽤나 체계적이고 철저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날이 갈수록 우리 집은 책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점점 흐트러지고 불규칙적이 되어 간다.


아동용 도서들은 크기와 모양이 천차만별이라 어떻게 꽂아도 책장이 깔끔해 보이지 않는다. 아들들에게 키순서대로 꽂으라고 백날 말해도 그때뿐이다. 아빠 성격을 그대로 닮은 첫째의 가방 속은 가관이다. 대충 욱여넣어서 책장이 접히고 찢어진 것들 투성이다. 물을 엎질러 젖어버린 교과서는 담임 선생님이 여분의 교과서로 바꿔주셨다. 책 보다 표지가 얇은 공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학습지는 제멋대로 접혀 있어 찾으려면 가방을 다 쏟고 하나하나 펴보아야 한다.


이미 아마존에서 e북이 종이책 판매량을 앞지른 지 오래다. 아들들에게 책 정리를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하면서도 책을 다루는 기쁨을 조금이라도 알게 해주고 싶다는 욕심이 드는데 말 그대로 그건 내 욕심일 뿐인 것 같다.


e북이 아무리 좋아도 책장을 넘길 때의 감촉, 종이 냄새를 맡는 기쁨,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책들에 둘러싸일 때의 충족감을 어찌 따라가겠느냐고 항변해보지만 역시 내 욕심이고 내 기분뿐인 것은 아닐지.


그 옛날,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고 죽간이 종이책으로 대체되었을 때 선조들도 그렇게 말했을 것 같다. 대나무의 묵직하고 진중한 느낌, 향긋한 나무향, 달그락거리는 소리, 이런 것들을 종이 따위가 어찌 따라가겠느냐고.


모든 것은 변하고 내 길 만이 정도가 아님을 매일 깨달아야 하는데 오늘도 동화책을 키 순서대로 꽂지 않았다고 아들들에게 잔소리를 하고야 말았다.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독서량도 현격히 준 주제에, 아들들에게는 엄격하면서 정작 나는 책 보다 스마트폰 들여다보는 시간이 더 많아진 주제에, 이래저래 반성할 거리가 많은 엄마다.


작가의 이전글 시인의 밥상 - 공지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