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엇비슷 Dec 27. 2020

한 번도 안 해봐서 잘 몰라!

모르는데 어떻게 해요

‘턱! 턱!’ 뭔가가 걸리는 소리. ATM기 쪽에서 나는 소리다. 카드를 넣었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고 소리만 난다고 하시는 고객님. 카드를 거꾸로 넣어서 저런 소리가 나는 것이니, 카드를 제대로 된 방향에 맞춰 넣어주시면 된다고 말씀드린다. 카드를 넣고 다시 시도해보시는 고객님. 다른 업무를 보고 있는 사이, 고객님은 ATM기와 한바탕 씨름을 하시다가 나에게 오셔서 말씀하신다.
“기계가 고장 난 모양이다. 계속 처음으로 돌아가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요새는 강산이 변하는 데 10년은 너무나 긴 시간이다. 스마트폰이 천천히 보급될 무렵, 나는 즐거운 대학생활을 채 누리지 못하고 조국의 부름에 이끌려 입대했었다. 훈련소를 지나 자대에 배치된 후 여러 선임들의 놀잇감이 되던 도중 한 선임이 나에게 했던 한 질문. “야! 신병아. 너 혹시 스마트폰 써봤어?" 그때는 다들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기껏해야 22, 23살 정도였을 텐데, 새로운 기술이 얼마나 궁금했을까. 선임들은 내 스마트폰 사용기에 신기해하며 동심의 세계로 돌아갔었다.

와. 그때가 어제 같은데. 핸드폰이 버튼이 있는 게 아니라 터치가 된다며 신기해하던 게 정말 어제 같은데. 요새는 집 안에서 터치 몇 번으로 물건을 사고, 카드를 발급하고, 돈을 이체할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이 점점 발전하면서 이런 편리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그 편리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소외되는 사람들도 있다.

시베리아에서 온 고기압인지 뭔지 덕분에 정말 추웠던 어느 겨울날. 출근하는 길 누군가가 계단에 앉아 있었다. 장갑을 낀 손으로 얼굴을 싸매고 계시다가 나를 보시곤 반갑게 인사하시는 할머니. “우체국 양반. 이제 오네.” 추운 날씨 탓인지 빨갛게 되어 있는 코가 먼저 눈에 띄었다. 낮 되고 조금 따뜻해지면 오시지 뭐하러 이 새벽부터 세찬 칼바람을 맞으면서 오셨냐고 여쭤보니, 말없이 옷 주머니를 여러 번 뒤적이시다가 찾은 통장을 나에게 건네주신다. “돈 들어왔는지 확인하려고!” 통장에 돈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확인하러 오신 거였다.

두 번만 누르면 되는데. 스마트폰에서 은행 앱을 누르는 데 한 번. 지문 인식하는 데 한 번. 나에게는 손가락을 두 번이면 되는 그 쉬운 일이 할머니에게는 걷기도 힘든 이 추운 날, 꽁꽁 얼은 땅을 30분을 걸어와야 할 수 있는 어려운 일인 것이다.

더군다나 할머니의 통장은 입출금 알림 서비스가 가입되어 있었다. 이 서비스에 가입이 되어 있으면 통장에서 얼마가 들어오거나 나갔고, 지금은 얼마가 남아 있다고 변동이 있을 때마다 지정된 전화번호로 문자가 전송된다. 할머니는 글자도 조그맣고 무슨 말인지 당최 알 수가 없어서 그냥 우체국에 물으러 오는 편이 훨씬 낫다고 하셨다.

스마트폰에 깔린 기본 앱(애플리케이션) 중에는 톱니바퀴 모양의 설정 앱이 있다. 그 앱에 들어가면 접근성이라는 메뉴가 있는데, 글이 잘 보이도록 글자 크기를 최대로 늘려준다거나, 문자가 온 것을 읽어준다거나, 버튼을 실수로 여러 번 눌러도 한 번만 인식되도록 하는 등 다양한 기능들이 있다. 잘 안보이시거나 또는 잘 들리지 않으시거나, 손이 떨려서 기기를 잘 활용하시지 못하는 분들을 위한 기능들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필요한 사람들이 이 기능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누가 가르쳐 준 적이 없으니까, 또 잘 모르시니까, 그래서 있어도 전혀 쓰시질 못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 나이가 지긋한 고객님이 스마트 밴드를 선물 받았다며 내게 보여주셨다. 차고 다니기에도 가볍고 디자인도 깔끔한 스마트 밴드. 하지만 그 밴드는 손목이 아닌 상자에 들어 있었다. 기껏 받은 선물을 왜 차고 다니지 않으시냐고 여쭤보니 마침 잘 됐다 물어보려고 가져왔다 하시며 상자 아래에 있던 종이를 꺼내신다. 종이에 적혀 있던 문장. '사용법은 다음 QR코드를 확인하세요.' QR코드가 정확하게 뭔지 몰라서 못 쓰셨다고.

'모르는 데 어떻게 가요!' 한 연예인이 해서 유행이 됐던 말. 정말 그 말이 맞다. 모르는 데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스마트 밴드를 사는 사람은 당연히 QR코드를 알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누구에게는 너무 당연해 보이는 것들이 또 다른 누군가에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고객님은 카드로 돈을 찾으려 하셨다. 분명히 저번에 배웠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며 시무룩해하시는 고객님을 격려해드린다. 뒤에서 도와드릴 테니 차례차례 천천히 해보시라 말씀드린다. 문제의 원인은 금방 밝혀졌다. 버튼을 오래 누르지 않아서 '입력시간 초과' 메시지가 뜨고 다시 처음 화면으로 돌아갔던 것.

ATM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여러 번 가르쳐 드리니 이제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시다가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지으신다. 또 까먹을 게 분명하다며 걱정하시는 고객님. “정신이 없어서, 돌아서면 까먹고, 봐도 까먹고, 들어도 까먹고.”

아직 익숙하지 않으셔서 그런 것이니 자주 해보시면 금방 잘하실 거다 말씀드리는 내게 고객님은 그저 고맙다 고맙다 하시며 떠나가셨다. 그거 가르쳐 드린 게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따스함이 느껴졌다.

사람 인 (人).
한자 사전에는 '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는데서 서로 기댄 모양'이라고 적혀있다. 기술이 발전하고 세상이 빠르게 변해도, 소외되는 이 하나 없이 서로 의지하고 서로 기대며 살아가길 소망한다. 모두에게 편리함이 정말 편리함이 되고, 당연한 것이 정말 당연한 것이 되기를.

이전 09화 Q. 한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낚시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