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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엇비슷 Nov 30. 2020

평생 같이 있자고 해놓고

상속, 남겨진 사람들

“엄마. 여기 앉아 있어! 금방 가져올게요!”


차에서 필요한 서류를 하나 가지고 오지 않으신 고객님은 어머니를 잠시 창구 앞 의자에 모시고 우체국 밖으로 잠시 나가셨다. 나는 다른 서류는 제대로 가져오신 게 맞는지 검토하고 있는 중이었다.


“평생 같이 있자고 해놓고......”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들리는 목소리. 나는 고개를 들어 의자에 앉아 계신 할머니를 쳐다본다. 할머니는 멍하니 바닥을 보시며 애꿎은 도장주머니만 계속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시고 계셨다.  




관사에서 우체국으로 출근하는 길. 왼편에는 야트막한 산이 있고, 오른편에는 긴 강이 흐르고 있다. 사시사철 여러 색으로 변해가는 산자락과 시절 따라 폭이 넓어졌다 좁아지는 강변을 보고 있노라면 출근 스트레스도 조금은 사라지는 편이다. 반대 차선으로 달려오는 차들 마저도 풍경이 되는 매일 아침. 가끔은 조금 씁쓸한 아침이 되는 경우도 있다. 저 멀리서 검은 운구차가 다가오고, 그 뒤를 장의 버스와 비상 깜빡이를 켠 승용차들이 따른다. 그런 풍경을 맞이할 때면, 또 누군가가 돌아가셨구나 생각하게 된다.


우체국을 찾아주시는 분들은 다른 은행의 고객과 비교했을 때 나이가 조금 있으신 편이다. 전체 퍼센트를 따지면 60대 이상의 고객님들이 절반을 차지하며, 특히 시골 우체국의 경우는 오시는 분의 거의 대부분의 고객님들이 70, 80대 이상의 고령층 고객님들 이시다. 내가 있는 우체국의 경우는 그래도 귀촌 인구가 있어서 젊은 사람들(주 고객층과 비교했을 때)이 조금 찾아주시는 편이다. 그래서 거의 오시는 분들이 계속 우체국을 방문해 주시는데, 가끔 처음 뵙는 듯한 고객님들이 4,5명 정도 들어오실 때가 있다. 다는 아니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상속 문제로 오신 분들이다.


돌아가신 분(피상속인)의 우체국 거래정보(예금, 보험 등)를 확인하려면 상속인 1명의 청구로도 가능하지만 피상속인의 예금을 찾으시려면 조금 절차가 더 복잡해진다. 일반적으로 피상속인 기준의 기본증명서, 가족관계 증명서가 있어야 하며 자세한 상속순위를 파악하기 위해 제적등본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모든 상속인이 함께 방문하셔서 예금을 찾으실 경우에는 위의 서류들과 함께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 같은 신분증(실명확인 증표)이 있으면 된다. 그러나 모든 상속인이 다 방문하시지 못하는 경우에는 대표 상속인이 다른 상속인들의 위임을 받고 각자의 인감도장을 찍은 위임장과 인감증명서를 가지고 오셔야 한다. 물론 서류를 제대로 가지고 오시는 경우는 드물다.



한 고객님이 계셨다. 월말이 되면 기초연금이나 국민연금이 나왔는지 확인하러 오시는 분들이 많으신데 이 고객님도 그들 중 하나였다. 1년 적금통장을 만드시고 얼마 되지도 않는 연금을 조금 떼서 달마다 차곡차곡 모아 만기가 되면 자식들에게 보내시던 분. 올해 3월. 만기 날짜에 돈을 찾아 셋째 딸한테 보내시곤, 또 1년 적금통장을 만들어 달라고 하셨다. 이번에는 막내아들 차례라고 하셨다. 적금 통장을 만들어 드리고 통장 뒷면에 만기 날짜를 적어드리며 ‘이 돈은 내년 이맘때쯤, 꽃 피는 삼월에 오셔서 보내시면 되겠다’ 그렇게 말씀드렸던 기억이 난다.


29일이나 30일. 달이 넘어갈 때쯤 찾아오셔서 통장에 들어온 연금을 확인하시고 또 그걸 조금 떼서 적금 통장에 넣고. 자동이체를 해놓으시면 그 작대기를 짚고 굳이 이 먼 우체국까지 찾아오실 필요 없으실 텐데 말씀드리는 나를 보고 활짝 웃으며 하시던 말. “오는 김에 잘생긴 총각 한 번 더 보고 가는 거지 뭐.” 그렇게 말씀하셨던 기억도 난다.


올해 7월부터 9월까지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역대 최고의 폭염이 될 거라 했지만 역대 최고의 장마가 찾아왔다. 매일 비만 내리고 우중충한 날씨가 이어지던 어느 여름날. 4명의 고객님이 내 앞으로 오셔서 통장과 여러 서류들을 주셨다. 상속이구나. 통장을 열어보고, 이름을 확인하고, 다시 확인해보고, 동명이인이 아닌가 서류를 들여다보고. 통장 제일 뒷면에는 내가 적어드렸던 내년 삼월의 만기 날짜가 있었다.


시골에는 혼자 사시거나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만 계시는 가정이 많다. 한 평생 그저 모을 줄만 아시고 쓸 줄은 모르시는 분들. 버스비 그 몇 푼이 아쉬워 몇 십리를 걸어오시는 할머니. 영 헤져서 솜털이 툭하고 튀어나온 옷만 입고 오시는 할머니. 몇 번이나 시도를 해야 시동이 걸리는 그 고물 경운기를 끌고 오시는 할아버지. 그런 분들에게 모아 두지만 말고 당신을 위해 좀 쓰시라고 말씀을 드려도 돌아오는 말은 늘 비슷하다. ‘내는 괜찮다. 내는 진짜 괜찮다...’ 말로만 그러시는 게 아니라 진짜로 괜찮으셔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좋겠다. 말로만 그러지 말고. 정말로.




“엄마는 또! 또 그런 표정하고 있다 참.”


서류를 찾으러 나가셨던 고객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시며 말씀하신다. 가방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할머니 눈에 고였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손가락 두 개로 할머니의 입꼬리를 올려 주신다. “그래 이 표정이다. 우리 엄마는 웃는 게 제일 곱다고 아버지가 그러셨어. 맞죠? 우리 엄마 예쁘죠?” 질문과 동시에 나를 쳐다보시는 두 모녀.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올해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씀드린다.


“이야! 이 우체국 아저씨는 거짓말도 잘한다. 맞제? 엄마.”

웃는 딸을 보시며 그제야 웃음을 터뜨리시는 할머니. 진짜로 소싯적, 젊은 시절에는 한 미모 하지 않으셨을까.


웃으면 복이 온다. 웃으면 복이 온다. 그럼 함께 웃으면 더 큰 복이 오지 않을까. 이 두 모녀에게 복이 빨리 배송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금 더 크게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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