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통은 사랑을 싣고
가끔 우체국 문가에 서서 밖을 쳐다볼 때가 있다. 새파란 하늘 아래 푸른 나무들이 무성한 산자락 아래로 퍼런 슬레이트 지붕들이 띄엄띄엄 보이고, 마지막으로 보이는 것은 우체국 앞에 있는 새빨간 우체통. 설치할 때 잘못 설치한 건지 아니면 땅이 꺼진 건지. 약간 비스듬한 모습이 눈에 띈다.
우체국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는 우체통 수거를 매일 오후 5시쯤 하는 편이다. 열어봐도 아무것도 없는 날이 더 많긴 하지만, 우표가 붙은 편지나 작은 엽서들이 들어 있기도 하다. 지갑이나 신분증이 있기도 하고 가끔 담배꽁초나 쓰레기가 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 새빨간 몸에다 흰 글씨로 크게 우체통이라고 적혀있는데 굳이 거기다가 쓰레기를 집어넣는 사람의 심보는 대체?
아무튼 지금처럼 12월이 되고 연말이 다가오던 작년 이맘때쯤. 여느 때처럼 우체통을 열어보니 구석에 알록달록한 편지봉투가 눈에 띄었다. 뒷면에 있는 하트 모양 스티커가 제대로 붙지 않아서 봉투가 조금 열려 있었다. 손을 뻗어 봉투를 꺼내고 앞면을 확인해 보았다. 크레파스로 정성스레 그린 크리스마스트리. 그리고 그 옆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크게 '산타할아버지께!' 누구의 글씨인지 대충 감이 왔다.
점심시간에는 잠시 우체국 셔터문을 내리고, 국장님과 함께 우체국 주위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는 편이다. 우체국이 있는 곳이 마을에서 그나마 번화가(?)에 속해 있는 편이라 여러 식당들이 있다. 중국집, 국밥집, 백반집 등등. 그중에서 자주 가는 곳은 백반집이다. 조금 거리가 있긴 하지만 나오는 반찬들이 하나같이 다 맛있어서 일주일에 두세 번은 가는 편이다.
3대가 함께하는 백반집. 할머니는 아주머니 한 분과 주방에서 요리를 하시고, 아들은 배달을 나가고, 며느리는 서빙을 하고, 주인인 할아버지는 카운터에 앉아 계신다. 홀에는 크고 작은 테이블들이 여러 개. 왼편에는 주방이 있고 화장실은 오른쪽 복도에 있다. 복도의 끝은 가정집이라 평소에는 큰 나무가 심긴 화분으로 가려져 있다. 어라라? 저게 누굴까? 화분 뒤로 보이는 똘망똘망한 두 눈.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가는 이 집 손자 되시겠다.
가끔 화분 뒤에서 나와 비어 있는 테이블에서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본다거나, 카운터에 있는 할아버지와 논다거나, 서빙하는 엄마를 도와준답시고 졸졸 엄마를 따라다닌다. 그런 모습을 보며 자연스레 웃고 있는 국장님과 나. 다른 손님들도 다들 흐뭇한 표정을 짓고 계신다. 가히 백반집의 마스코트.
나름 단골손님인 국장님과 나를 편하게 느낀 건지 우리 옆자리에서 색칠 공부를 하기도 하고, 일기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공책에 글을 적기도 한다. 음식이 나오기 전 책을 읽어 달라던 적도 있었다. 2장을 채 읽기도 전에 음식이 나오고, 어른들을 귀찮게 하지 말라며 엄마는 꾸짖고, 입이 잔뜩 튀어나와서 화분 뒤로 도망가고. 그런 모습을 보는 내 광대는 또 올라가고.
편지 봉투에 적힌 글씨는 내 면밀한 검토 결과 우리 백반집의 귀염둥이가 쓴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우표도 없고 제대로 된 주소도 적혀있지 않으니 접수할 수는 없지. 편지를 들고 국장님께 보여드린다. 보시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으신다.
"아이쿠. 안타깝지만 접수는 못하겠네. 다시 반송을 해줘야 할까?"
"아니면 산타할아버지께 직접 가져다 드릴까요?"
의아한 표정으로 날 보시다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시는 국장님. 집배원들도 안 계시고 국장님도 바쁘시고. 편지를 배달하는 귀중한 임무는 나에게 주어졌다. 퇴근 후 편지를 들고 백반집으로 향한다.
백반집 밖 나무의자에 앉아 계시는 할아버지. 멍하니 산을 바라보고 계신다. 편지를 건네 드리니 껄껄 웃으시며 말씀하신다. "이 산타할아버지는 내가 아니라 내 아들일건데?" 아들이 바쁘니 대신 읽어보신다며 편지를 꺼내신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눈시울이 살짝 붉어지시는 할아버지. "나이가 들면 쓸데없이 눈물이 많아져." 편지를 여러 번 읽어 보시다가 나한테도 살짝 보여주신다. 삐뚤빼뚤하지만 그래도 손으로 꾹꾹 정성스레 눌러쓴 글자들. 아. 쓸데없이 눈물이 많아지는 건 아무래도 나이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우편법 제1장 제3조 우편물 등의 비밀보장」에 따라 안타깝게도 편지의 내용은 말할 수 없지만, 편지를 전달한 그다음 주 월요일, 점심을 먹으러 찾아간 백반집은 닫혀있었다. 문 앞에는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떠나 오늘 하루 문을 닫는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안내문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국장님과 나는 옆에 있는 국밥집으로 발길을 옮긴다. 크리스마스도 아직 안 됐는데 선물 배송이 굉장히 빠르다는 둥 어찌 되었든 맘에 들었으면 좋겠다는 둥의 대화를 나누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