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 수행, 강력한 알아차림의 효과

by 나무둘

[1분 인생 힌트] 설거지 수행, 강력한 알아차림의 효과


설거지를 좋아합니다.

설거지를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설거지는 만만합니다. 엄청나게 쌓여 있어도 결과가 금방에 눈에 보입니다. 집안 청소는 면적과 속사정(?) 때문에 하려고 덤벼들면 청소할 게 끝도 없어 보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눈을 감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 종일 청소를 하고도 지치기만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설거지는 다릅니다. 쓱쓱 닦다가 보면 한숨만 나던 설거짓거리들이 금세 사라져 있습니다. 어느새 상쾌함이 찾아 옵니다.


그리고 설거지의 좋은 점 한 가지 더.

설거지를 하면 온갖 잡생각이 나기 쉽습니다. 가히 설거지 수행이라 부를 만한, 강력한 효과가 있는 수행법.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설거지 수행에 대해 이야기해 봅니다.



마음을 닦는 설거지 수행의 엄청난 효과


어젯밤에도 설거지를 했습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안 건들인 것 같은 개수대의 그릇들. 밥 그릇, 반찬 그릇, 접시, 컵, 숟가락, 젓가락, 커피포트, 커피포트와 함께 붙어 있는 잡다한 부속품들, 밥솥, 냄비, 주걱, 작은 국자, 큰 국자, 칼 등등. 도대체 식기도구는 왜 이리 많은 것인가. 이 많은 것들은 누가 다 먹은 것인가. 도대체 우리 집사람은 설거지를 바로 안 하고 쌓아두는가. 여러 생각이 침투합니다.


생각의 침투.

트라우마 증상에서 말하는 Flashback. 침투는 트라우마의 증상 중 첫 번째로 손꼽히는 증상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와 함께 먹었던 행위와 나는 없이 먹었을 행위와 먹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갑니다. 아 미우나 고우나 우리집 사람들입니다. 사랑합니다 이 사람들아. 내가 설거지 좋아하는 걸 어찌 이리 잘 아는지. 역시 우리 가족뿐입니다. 참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침투가 일어나면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니 트라우마에서도 손꼽는 증상이겠지요. 침투는 말 그대로 머릿속에 침투해서 머릿속을 장악합니다. 생각은 많지만 그 모든 것들이 몇 마디 의성어로 압축되어 쏟아집니다.



아 도대체 왜!
아 진짜!


정말 왜 그러는 걸까요? 뭐 하나 비슷한 구석이 없습니다. 식기 하나 처리하는 방식까지도 다릅니다. 나 이외에는 모두 타인이라는 명제가 실감납니다. 정말이지 아무리 오래 같이 살아도 타인이 확실합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식구도 피 한 방울 섞인 식구도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도 타인입니다.


이미 설거지를 하면서 수도 없이 경험한 심리적 외상 속으로 진입하려는 기미가 보입니다. 아뿔싸. 이건 아닙니다. 그만큼 경험했으면 됐지. 다행히도 '도대체 왜, 아 진짜'라고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습니다. 기분의 신기한 점은 입 밖으로 내뱉으면 그 기분이 확정적으로 느껴지고 증폭된다는 점입니다. 머릿속에 돌고 도는 '아 도대체 왜'와 '아 진짜'. 머릿속에 침투하는 생각들을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신기하게도 그것들은 그것들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 있습니다. 휘말리나 싶어 계속 관찰해 보아도 머릿속의 시끄러움과 내가 따로 떨어져 있는 이 현상이 계속 유지됩니다.


잠깐 샛길로 빠져서 한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단순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 어떤 치유 효과가 있는지 이야기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잡일을 할 때면 늘 느끼는 것인데 단순 동작을 반복하다가 보면 머릿속에서 과거 해묵은 경험이 재생되면서 여러가지 상념이 듭니다. 까맣게 잊었던 것들도 생각이 나는 걸 보면 뇌는 참 대단합니다. 즐겁고 유쾌했던 경험보다는 그 당시에 상처를 입었던 경험들이 떠오르는데 이는 단순 작업이 일종의 트랜스 상태를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일상 속에서 꿈을 꾸는 듯한 상태에 진입하면 뇌는 완전히 처리되지 않은 번잡한 기억들을 끄집어 내는 것이지요. 꿈분석이란 그런 점을 활용해서 꿈에 등장한 주제를 분석해서 치유를 돕는 것이고요. 그런 면에서 단순 작업은 참 유용합니다. 몇 시간씩 자지 않아도 깨어 있으면서 내 무의식에 접속하게 하니까요.


이제 다시 설거지 이야기로 돌아와서, 어제는 머릿속의 시끄러운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는 것을 지속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머릿속 생각을 듣고 있었지요. 굳이 글로 표현하자면 아래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또! 설거지가 잔뜩 쌓여 있군! 으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네.

살짝 자극이 올라오고 있네.


(하루 종일 설거지를 쌓아 놓다니 정말 시간이 전혀 없었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네.

자주 하던 생각이네.


(시간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텐데 얼마나 이야기를 해야 될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네.

어차피 해봐야 소용 없는 생각을 또 하고 있네.


(얼마나 더 이야기를 해야 설거지가 쌓이지 않을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네.

차라리 이런 생각을 안 하고 설거지에나 집중하는 게 좋겠다.



이런 식으로 계속 알아차림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아주 미세한 분노의 기미가 느껴지면 그때마다 감정 반응이 일어나기 전에 몸에서 감정이 느껴지면서 몸에서 먼저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생각을 약간이라도 물고 늘어지면 감정으로 발전하겠다는 게 분명했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리고 있자 감정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솟아나려는 것과 동시에 상쇄되어 아침 햇살에 아지랑이처럼 사라진다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생각은 멀리서 들리는 메아리처럼 작은 목소리로 오고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관찰하고 있지나 생각과 나는 별개라는 게 분명하게 인식됐습니다. 생각과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생각이 마치 나름의 생명력이 있는 생물체처럼 제멋대로 오고가는 걸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분명했습니다. 생각은 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각은 바람과 구름처럼 조건이 맞으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저 그런 것이었습니다. 신기하면서도 내 것이 아닌 생각에는 아무 감정적 부착물이 없이 건조하다는 것도 참 흥미로웠습니다.


설거지 수행.

일상의 활동 중에 오랫동안 알아차림이 지속되는 경험은 오랜만이라 신선했습니다. 부정적 생각과 감정이 나타나는 즉시 소멸하는 즐거움. 그 무엇에도 방해 받지 않는 확고한 자신감. 몸도 마음도 지금 여기에서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자유로움. 진정으로 마음의 평화를 경험하고 싶다면 설거지를 하면 됩니다. 나도 행복하게 하고 식구들도 행복하게 하는 설거지 수행! 앞으로도 집안의 모든 식기를 제가 닦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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