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HB
수난(受難)이다.
이것은 분명 수난. 이다
미국와서 난생처음 글쓰기라는 걸 시작했는데.
어라. 이제 저장해둔 글이 바닥이 보이네?
아무거나 써야하나. 아무말이라도 해야하나.
나는 좀 오타쿠적 기질이 있다.
남편은 밤을 세워 12편짜리 드라마를 완결하고
새벽을 맞는 못생긴 나를 보며 늘 말한다.
오타쿠님. 오늘도 덕하셨습니까 -
어려서부터 그랬던거 같다
수퍼마켓에 신제품 과자가 나와서 호기심에 먹어보니 오오?? 맛있네?? 하면 주구장창 그 녀석만 먹는다.
물려서 다시는 쳐다도 안볼때까지.
한번은 중요한 시험을 치르고
그간 나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당시 동네에 100미터 간격으로 있던 PC방에 들렀다.
그리고 나는 정확히 이틀후 새벽에 그 PC방을 나섰다.
1시간에 5백원 짜리 PC방을 나서며 내가 내민 금액은 18,000원 이었다.
정확히 기억한다.
나도 너무 충격이었는데
나를 보는 그 알바생의 눈빛이 더 충격이어서.
그때 나를 36시간동안 한자리에 묶어 두었던 범인은 <프리즌 브레이크> 라는 미드였다.
하필 나온지 한참된 드라마여서 시즌3까지 보느라 나는 마음이 급했다.
나중에는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안난다. 두달 내내 먹었던 그 과자처럼.
아침햇살을 받으며 지하 PC방을 나오는데
한없이 밀려드는 자괴감은 둘째치고
안그래도 가난한 내가 미국 드라마 따위에 귀한 18,000원을 썼다는게 아까워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몇 달 후 나는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중요한 그 시험 결과가 잘 나와서
나는 다시 한번 나를 격려하기 위해,
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pc방에 마실을 나갔다.
내가 마치 갈곳이 PC방 밖에 없는 사람같은데...
당시의 pc방이 지금 스마트폰의 팝업스토어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
동생이 밤새 알바를 하면 심심할거 같다는 이유도 덧붙여서.
6시에 동생에게 코를 찡긋하며 자리에 앉은 나는 다음날 6시까지 화장실 한번을 가지않고
맞고를 쳤다.
그렇다. 온라인 고스톱을 12시간동안.
마치 타짜가 빙의한듯이.
알바를 마친 동생과 집으로 돌아가던 그날도.
왜 때문에 아침햇살이 그리도 찬란했는지 !
동생이 말했다.
누나야.
사장님이 누나 맞냐고 물어보더라고.
근데 표정이 너무 안좋으셔서
내가 누나 중요한 시험 합격해서 그동안 못 논거 노는 거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사장님 표정이 밝아지면서
- 그래. 어쩐지.
뭘해도 할 사람같드라 -
하시드라.
어. 그래.
미안.
나는 이렇다.
진돗개 마냥 물고늘어져서
좋으면 좋은대로, 싫으면 또 싫은대로
끝을봐야 직성이 풀린다.
여튼.
미국에 와서 시작한 글쓰기가 미국수난기의 소재가 될 줄이야.
말이 나온김에
미국아이들을 글쓰기 연습을 많이 한다.
4학년 아이가 학교 수업시간 학습자료들을 한달에 한번 가지고 온다.
아이는 늘 어떤 주제에 대해 다양한 관점, 다양한 카테고리로 글을 쓴다.
내가 좋아하는 과일에 관해 글을 쓴다면
왜 그 과일을 좋아하고, 그 과일에 대한 경험이나 과일을 주제로한 책에 대한 내용을 적는다.
네 칸짜리 상자에 자유롭게 간단히라도 적는다.
아이의 같은반 친구들사이에 최근 트렌드는 소설이나 카툰을 쓰는 놀이다.
어느 저녁, 딸이 책꽂이에서 새 노트를 하나 꺼내더니 표지에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제목을 쓴다.
릴리 오브 더 밸리.
아이는 반에서 왕따를 당하던 여자 주인공이 본인을 괴롭히던 삼총사에게 복수를 하는 내용의 소설을 쓴다고 했다. 주인공과 민걸들의 이름을 정하며 우리는 한판 논쟁이 붙었다.
S자로 시작하는 이름으로 하자, 주인공은 좀 부드럽고 여린 느낌으로 가쟈. 아니다 좀더 강한 이미지의 이름이 반전 매력이 있다. 등등.
그렇게 영어로 문장한줄 못쓰던 아이가 소설을 쓰겠다고 나서는 것은
다 학교에서 비중을 두는 글쓰기 교육의 효과가 아닐지 생각한다.
1학년 아이도 마찬가지다
어느날 아이가 학교에서 가져온 그림일기에는 귀여운 여자아이들의 행복한 미소를 짓고있다.
그리고 그아래 글에는 Sistr and Me HB Hb. 이렇게 씌여있다.
시스터와내가... 에이치비 에이치비. 이게 뭐지.
학교에 학년초 상담을 가서야 알았다.
아이는 한참 파닉스를 배우고 있었고,
선생님은 학년초에 아이가 쓴 그림일기와 지금 아이의 문장을 보여주며 비교해주셨다.
알파벳의 나열이었던 아이의 글쓰기는 이제 얼추 문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HB는 햅비, Happy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내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선생님께 문장을 교정받고 있을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니
안심이 되었다.
다른 곳은 잘 모르지만
초등학교에는 담임선생님과 보조선생님, 두분이 교실에 계신다.
그래서 우리 아이처럼 외국에서 왔거나 학습이 느린 친구들은 보조 선생님께서 도움을 주신다.
학습이 많이 부진한 친구들은 아예 전담 교사가 밀착해서 몇달을 지내기도 한다.
흔한 공립초등학교의 모습니다.
다시 글쓰기 얘기로 돌아와서
아이들의 글쓰기 생활은 투입만 있었던 언어생활을 완성하는 중요한 기회였다.
말을 잘 못하니 듣기만하는 아이들
짧은 문장만 구사하는 아이들에게
쓰기.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좋은 통로가 되었다.
선생님은 둘째가 지난 주말에 어떤 곳에 갔고 얼마나 HB했는지 그날 아이가 그린 글을 보고 알고있다.
나도 한달에 한번 받는 꾸러미를 들춰보며 아이의 친구생활을 옅본다.
나의 글쓰기도 질세라,
간헐차게 타닥타닥 두드린다.
나도 HB HB한 글을 쓰고싶어서
나도 너처럼 성장하고 싶어서
처음에 쓴 글보다, 더 잘 읽어지는 좋은 글을 써보려
너의 일기를 들여다본다.
웃음이 난다.
너의 그림속에 나는 늘 웃고있다.
너의 기억속에 우리는 늘 HB HB 하다.
누군가의 마음에 HB한 마음이 가득 차오르는 글을 쓰는 그날까지
나의 미국수난기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동네 피씨방 만팔천원짜리 고객이니까.
추신.
내가 애정하는 작가, 교수인 애덤 그랜트의 최근 저서 히든 포텐셜에 글쓰기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데이터와 논리로 무장한, 그런데도 감성을 자극하는 그의 글이
처음부터 완벽했던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처음 하버드에 입학했을때 글쓰기 교실에 가야했다.
그는 처음부터 정규수업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만큼 하버드는 글쓰기에 진심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학생들이 가장 듣고싶은 강의를 하는 교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