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돈다
한국과 미국은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시차. time deference. 가 있다.
미국 동부는 한국과 더 멀기에 14시간이나 시간차이가 있다.
이 시간의 차이는
제법 많은 불편을 만들어낸다
처음 미국에 오기 위해 준비할 때
미리 전기와 수도를 개설해야 했다.
계정을 만들고 입주날짜를 정하고 전기와 수도를 미리 신청해 두어야 미국에 도착해서 내 집에서 밥도 해 먹고 추운 겨울 히터도 틀 수 있으니까.
한국은 한창 연말분위기가 무르익어가던
그래서 종종 술에 취해 귀가하던 시즌이었다.
저녁 열 시. 미국동부 시각 오전 8시.
이제 콜센터가 문을 여는 시각.
적당히 취기도 올라왔겠다. 용기를 내어 택시 안에서 미국전기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땡큐 콜링 투 전기회사. 위아. 블라블라.
이프 유 원투 블라블라.
프레스 원.
프레스 투.
프레스 쓰리.
택시 안에 잔잔히 흘러나오는 라디오 음악소리가 원망스러울 만큼 안. 들. 린. 다.
나는 당황해서 전화를 끊었다.
헉. 이렇게 안 들리다니.
그냥 토익시험처럼 그냥 술술(?) 들릴 줄 알고 전화를 걸었던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래. 맨 정신으로 전화하자.
그날 밤은 옅은 자괴감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
맨 정신은 낮에만.
연말 밤은 늘 알코올에 젖은 나.
다음날도 어쩔 수 없이(?) 나는 또 알코올을 투입하고 귀가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끝을 내자. 이러다 양초를 켜고 집에서 잠을 청해야 할지도 몰라.
전기회사의 오토매틱 전화 서비스를 일요일 오전에 치는 토익 듣기 시험이라 생각하고
나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크게 한 후 통화버튼을 눌렀다.
역시 반복이 왕도로구나
다시 들어보니 어제 내가 못 알아들은 그 안내가 조금 이해되었다.
나는 무사히 뉴어카운트를 만들어주는 콜센터 담당자에게로 잘 인도되어 도착했다.
우리는 전화선 위에 아슬아슬 마주 앉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까끌거렸고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으며 그 발음은 어디서부터 뭉개지는 건지 정확한 지점을 찾지 못한 채 나는 그저 이끌려갔다.
여러 번 파든?.. 아임쏘리. 아임 낫 굿앳 잉글리시.
이름을 말할 때는 Y는 Yesterday의 Y이고요, N은 Nancy 할 때 N이고요..
이메일 주소를 알려줄 때도 마찬가지로 B는 boy 할 때 B고요... 이런 식으로 스펠링 하나하나를
설명해야 했다.
계정을 만들고 난 후 콜센터 직원이 잠시만 기다려보라며 연결해 준 누군가는
나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부가서비스 가입을 권유했다.
그는 정말 급해 보였다.
내가 노.라고 할 때마다 그의 목소리는 더 빨라지고, 억양은 고조되었다.
그 서비스에 가입하지 않으면 토네이도가 오는 밤에 전기 없이 고립되어 한 보름 살아야 할 거 같은.
그런 긴박감 넘치는 마케팅전략이었다.
하지만 나의 리스닝 능력은 그 모든 것을 느낌, 으로만 이해하는 수준이므로.
내 귀에 남은 그의 발언은 오로지. 롸잇? 롸잇? 맴. 웨이트. 요정도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집에 도착할 즈음에 시계는 10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회사에서 마신 알코올은 이미 다 증발하고 나는 마치 두 시간 동안 토익듣기기험만 치고 나온 사람처럼 기진맥진했다.
그래도 이제 미국에 가면 인덕션으로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겠지. 안도감을 느끼며 가뿐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몇 가지 일들을 처리하느라
나는 밤 10시가 넘으면 방으로 들어가 콜센터 직원들을 만났다.
마치 퇴근 후 매일 밤 화상영어를 시작하는 갓생러처럼.
그들은 다양한 국가에서 온 사람들 같았다.
놀라울 만큼 빠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발음. 낯선 악센트를 구사하는 다양한 언어권의 콜센터 직원들에게
캔유스피크슬로우리?라는 일관된 대사를 쳐대며 나의 소중한 취침시간을 한 시간씩 뒤로 미루었다.
언어의 장벽만큼. 시차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었다.
뭔가 문제가 생기면 나는 한국인의 취침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것은 성격이 급한 나에게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메일을 보내면 적어도 24시간이 지나야 답을 받을 수 있었다.
가끔 잘못된 영수증을 받거나
오버차징된 청구서를 받으면
아침 6시였고
그때는 이미 그들은 퇴근한 후였다.
그럼 나는 그날 밤 10시 혹은 11시가 되어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전화를 걸어서도 롸잇? 코렉? 같은 단어만 알아듣는 나의 답답한 귀를 원망하면서.
중견기업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수출담당일을 하던 후배가 회사를 이직하면서 한 말이 생각났다.
다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나만 사무실에 남아서 상대방 회사의 담당자가 출근할 때까지 기다릴 때.
그마저도 가끔 그들이 긴 휴가를 가버려 통화가 되지 않을 때
나는 언제 집에 갈 수 있나. 했었다는 이야기.
세계는 하나다.
24시간 상당을 해주는 로봇상담사도 있고
지구반대편 나라로 출발하는 국내선 비행기는 매일 이륙하지만
그래도 사람은 밤에 잠을 자고, 오후 6시에는 대부분(!) 퇴근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난감하다.
가끔은 나의 저녁이 너의 아침이고
나의 오늘이 너의 어제임을 깨닫는 순간.
아. 내가 둥근 지구에 살고 있구나.
코페르니쿠스가 말한 것처럼 나는 도는 지구 위에서 함께 돌고 있구나.
우주의 신비를 체험한다.
그리고 나의 치밀하지 못함에 경탄한다.
나는 늘 잠든 남편에게 전화를 걸고
어제 아침 도착한 친구의 톡에, 오늘 오후 1시(한국은 새벽 3시)에 답을 하기도 하며
목요일 오전(한국시각) 발행 예정인 나의 브런치북을
마감시간 지난 잡지사 직원마냥 급한 마음으로
수요일 아침(한국시각 수요일밤)에 발행 버튼을 누르기도 한다.
지난주에도 발행시간을 놓쳤던 나는
오늘은 하루씩이나 일찍 브런치 연재글을 발행하고 안도를 한숨을 내쉬었더랬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내가 여전히 발행약속을 지키지 않은 불량 연재자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지구가 도는 속도를 내가 따라가지 못하는구나.
내가 이래서 글로벌 인재는 못되구나. 한심한 내 시간관념을 자책한다.
느리게 돌아도, 어쩌다 좀 급하게 돌아도.
나만의 시계 위에 내 인생은 그래도 밤과 낮을 온전히 누리고 있기에
나의 부족한 글을 읽어주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드리고 싶다.
지금은 해가 지고 있다.
오후 4시 29분.
한국은 이제 직장인들이 가장 힘들어한다는 목요일 아침을 시작하고 있을 것이다.
무거운 몸을 끌고 이를 닦으며 구글캘린더를 확인하고
아이들의 아침을 만들며 오늘 입힐 옷을 챙기고
아직 혈관 구석에 남은 숙취세포를 온몸으로 느끼며 지하철에 몸을 싣겠지.
누군가의 브런치 글을 읽으며 쿡쿡 웃기도 하고
아침 뉴스를 검색하며 한숨을 쉴는지도.
눈에 선한 아침의 풍경을 글로 그리며
나는 해가거의 남지 않는 뒤뜰을 바라본다.
창문에 비친 크리스마크 트리 불빛을 보며 아이들에게 소리친다.
얘들아 저녁 먹자!!
나의 저녁이 당신의 아침이 되는
당신의 어제가 나의 오늘이 되는
이 아름다운 지구별에 함께 살게 되어 즐겁습니다.
나는 오늘도
우주 어디엔가 살고 있을 또 다른 나를 생각하며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떠올립니다.
우리는 신이 만든 시간과 공간의 씨줄과 날줄들 사이 어느 한 점에서 만났습니다.
나는 그 절묘의 차이를 극복하고 찾아올 당신을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
제 글을 읽어주셔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