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국수난기 4 - 마음 고생 편
나는 나름의 교육철학(?)을 가진 엄마였다.
물론 철학은 철학인바, 그저 생각할 뿐 행위에 적극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철학을 가지므로, 자부심+자기합리화+아전인수식 해석 을 믹스하여 아이들의 유아기를
적절한 방임으로 일관했다.
아이의 성장에는 대근육, 소근육 발달기가 있고
놀이와 여백(?)을 통해 아이의 신체발달과 창의력을 키우고
초등4학년부터 학습을 시키겠다.
뭐. 이런 나름의 계획? 같은게 있었다.
아침8시부터 밤9시까지 일터에서 구르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상대적으로 귀가시간이 이른 남편과 아이들이 거실에서 학습지를 풀고있다.
남편의 무서운 표정과 말투, 아이들의 졸린 눈과 주눅든 표정.
싱크대에 선채 늦은 저녁을 허겁지겁 먹으며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나의 개똥철학을 상기한다.
그리고 남편의 조급함과 서투른 교습방법을 마음속으로 비난했다.
나는 늘 책을 읽었고, 첫아이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독서하는 엄마.
첫아이는 한글의 자음모음을 배우지 않은채로 한글을 익혔고
그것은 뭐랄까. 나에게는 큰 자랑, 이었다..
내 교육철학을 강화시켜주는.
그리고 우리는 미국에 왔다.
처음에 미국에 오니 내 철학은 더 강화되었다.
미국 아이들은 하루종일 놀았고, 저녁 8시면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나무를 타오르고, 흙을 파 돌멩이를 줍고, 개미들을 괴롭히고, 동네 고양이와 어울려 돌아다녔다.
뭐. 이렇게 놀아도
일론머스크나오고 스티브잡스 나오잖아.
나이키, 구글, 앤비디아도 얘네꺼야
노벨상도 젤 많이 받았어.
그래 창의력은 이렇게 키워지는 거야.
흐뭇했다
아이들은 영어를 제대로 배우지 않고 이곳에 왔다.
여섯살 둘째는 어린이집에서 일주일에 한번 만나는 써니티쳐에게 잇츠 써니 투데이! 만 배우고 이곳에 왔다.
남편이 없으니 아이들의 학습은 당연히 내 몫이 되었다.
처음 두어달은 아이들이 적응하느라 힘들다는 이유로 놀았다.
영어동화책을 읽어주며 구글번역기를 열심히 찾았다.
동화책에 모르는 단어가 이리도 많을 줄이야...
나의 교육은 잠들기전 동화책 두어권 읽어주는게 다였다. 역시 학국에서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변했다.
아이들의 영어는 생각보다 더디게 늘었다.
첫아이의 기말성적표는 참담했다.
이 동네에 살고있는 한국아이들은 대부분 영어유치원 출신(?)이었고
내 아이앞에서 자기들끼리 영어로 말했다.
대만에서 전학온 친구와 친해졌지만 금세 균열이 생겼다.
언어의 장벽은 성격차이만큼이나 아이의 친구만들기에 방해가 되었다.
대치동에서 온 우리말과 영어를 함께쓰며 2년이나 앞선 수학책을 풀고있는 영특한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내 뱃속에 가스가 보글보글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한국 대학병원 의사선생님 가정에 둘러싸여
말한마디 못하는 우리 아이들을 보고있자니 헛웃음이 났다.
선하고 좋은 이웃들에게 열폭하자니 죄책감이 들었다.
그냥 울고싶었다.
아이들이 영어를 못해서? 제 나이에 맞는 수학문제도 잘 못푸니까?
그래.
그런데 그것보다 더 나를 울고싶게 만든건.
교육철학과 쿨함으로 무장했던 내 조바심이 고개를 들어올렸다는 것이엇다.
열패감.
나는 패배했다.
한국의 화려한 사교육시스템에.
그렇게 나도 공부시키는, 엄마가 되었다.
미국에도 한국 문제집들이 좀 있었다.
많이 비쌌다. 그래도 주문했다.
미국 초등참고서도 주문했다.
이렇게 나의 맹모 흉내내기가 시작되었다.
한국아이가 미국에 오면 수학이 쉽다하더니 꼭 그런것도 아니다.
영어로 문제를 내면 나도 무슨말인지 모르는 문제들이 종종 있다.
미국의 국어는 다시 수능공부하던 시절로 돌아간듯한 기다란 지문과 5지선다 문제.
3번인지 4번인지 헷갈리는 애매한 선택지
뭐야.
미국오면 다 우등생되는거 아니었어?
아니야. 미안해.
그런거 없음.
한국의 수학진도는 더욱 난감했다.
아이는 여러 사각형의 정의를 외워도외워도 잊어버렸고
소수점 앞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생각없는 사람으로 변했으며
각도를 재기 위해 각도기를 두개나 사야했다.
미국의 각도기는 왜 중간에 구멍이 나있는거지.
한글도 그리며 쓰는 둘째는 이제 알파벳 대소문자도 그려야했다.
그냥 그림을 그리는 마음으로 우리는 알파벳을 익혔다.
듣고 말하는것은 나가 놀면서 한다치더라도 읽고 쓰는것은 결국 내 몫이었다
한글과 영어. 덧셈과 뺄셈, 큰수와 작은수, 가르기와 모으기,
심지어 전자시계 보는 법, 젓가락 질까지 모두 가르쳐야했다.
바늘이 있는 시계는 아직 시작도 못했다.
모든것이 다 가내수(공)업이었다
여기는 학원이 없으니까.
그리고 나는 한국에서보다 훨씬 시간이 많으니까.
아이들과 책상위에서 씨름하다보면 저녁시간은 금세 지나간다.
양쪽 아이들을 오가며 허둥지둥.
적어도 주1회 고성을 지르며 괴물변신
나는 내얼굴을 볼 수 없지만
말귀를 못알아먹는 아이들에게 보내는 내 눈빛은
흡사 헐크나 늑대사람의 그것일 것이다.
그렇게 화를 낸 날은 밤이 깊도록 잠을 잘 수 없다.
죄책감에 몸서리치면서 잠든 아이들을 내려다본다.
다짐한다.
내일은 옆집아줌마나 학원선생님처럼 관대한 내가 되어야지.
모르는게 무슨 죄라고
오후내내 뛰어놀고 들어온 너희를 세상 파렴치한 열등생으로 비난해야했던 걸까.
내 한숨은 왜 그리도 불필요하게 무거워 너희를 모멸감의 늪으로 밀어 넣는가.
왜 나는 이리도 옹졸하고 치사한가.
그렇게 업앤다운 업앤다운
이제 반년이 지나고 있다.
여전히 나는 한국에서 보았던 남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는 성급한 지도자이며
아이들도 장족의 발전을 하거나 처칠이나 에디슨 같은 천재성을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다만,
홀로 아이들을 돌본 지난 몇달간,
회사일이라는 허울로 허구헌날 술에취해 귀가하고
아이들을 필사의 노력으로 가르치던 남편의 정성을 아마추어리즘 혹은 집착으로 비하하던
이기적인 내자신를 마주했다.
철학은 무슨 철학.
사람사는거 다 똑같다.
40년전이나 100년 전이나 500년 전이나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고
가르치치 않으면 배울 수 없다.
한국 사교육을 비난하면서도 결국에 외주에 의존할 나였음을.
그러고는 학원숙제도 들여다 봐주지 않을 무책임한 주양육자일 것임을.
어린이집 선생님, 할머니 할아버지가 삼위일체로 가르친 젓가락질과 시계보기를
너는 지금도 외면하고 있지 않나.
방학이면 함께 같은 책을 읽고 원고지 앞에서 함께 독후감을 써주던 엄마.
밀린 방학숙제를 늦음 밤까지 함께 완성해주던 아빠.
수제로 만든 부루마블 판을 펼쳐 내게 숫자세는 법, 돈계산 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옆집언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독일에서 수입해온 값비싼 교구나 유대인 엄마가 쓴 교육철학 도서가 아닌지도 모른다.
아이와 함께 놀아주고 아이의 숙제를 함께 고민하고
아이의 무지함과 느림을 부끄러워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이끌어주고 일으켜 주는 책임감.
그것은 내가 똥누다가 휴대폰 보며 남의 집 아이들 잘난 이야기에 열폭하는 시간동안에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일이다.
항상 내가 읽던 전집을 뒤따라 읽던 엄마.
그래서 내가 읽은 책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었던 평론가.
방학이면 내내 밖에서 놀다가 집에오면 포슬한 감자를, 달작지근한 옥수수를 쪄 놓고 있던 엄마.
옥수수를 먹으며 함께 숙제를 하던 엄마와 나의 오후.
아이들에게 그런 오후를 남겨주고 싶다.
매일매일 조금씩 쌓아올려 먼 후일에 아, 내가 그랬었지.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구나.
떠올리는 그런 오후를.
오늘도 나는 이것저것 가르친다.
어금니를 구석구석 닦는 방법부터 꺽은선 그래프의 해석이 사회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종종
괴물로 변신한다.
나에게도 누군가 가르쳐주면 좋겠다.
나를 일으키고 내 등을 어루만지며 더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을 알려주면 좋겠다.
참.
그리고 내 교육철학은 아직 전과 같은 노선위에 있다.
아직은.
오늘 밤에도 별이 가슴에 스치운다. 얘들아, 미안하다. 학원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