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첫 강의를 꾸리며
요가 지도자 과정을 시작할 때 '과연 내가 요가 강사가 될 수 있을까? 자격증을 딴다고 해도 회사 다니면서 강의를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3개월의 과정 끝에 작년 12월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했고, 올 2월에 3개의 강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감사하게도 요가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했던 요가원에서 주말 1회 강의 기회가 주어졌고, 2월부터 격주로 호주 친구에게 요가를 가르치게 되었다. 삶은 나에게 기회를 주고 있고 나는 그 길을 가고 있다.
얼마 동안은 아쉬탕가에 빠져 수련하다가 또 하타에 빠져 하타를 수련하다 다시 또 아쉬탕가가 좋아 아쉬탕가를 수련하기를 반복하고 있기에 나의 첫 수업에서 어떤 형태의 요가를 할지부터가 고민이었다.
한참 고민 후에 나의 선택은 아쉬탕가가 되었다. 요즘 다시 푹 빠져 수련하기도 하고, 지도자 자격증 과정의 마지막 과제인 조별 수업 구성 및 시연에서 하타에 가까운 요가를 했기에 이번에는 아쉬탕가를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것은 고민의 끝이 아니었다. 시퀀스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할 것인가, 레벨은 어떻게 나눌 것인가, 아사나에 집중할 것인가, 호흡에 집중할 것인가, 반다를 말할 것인가, 사바아사나는 몇 분을 할까, 음악을 틀까 말까 수업 구성에 대한 많은 생각과 고민이 이어졌고,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내가 가르침을 받았던 선생님들처럼 멋져 보이고 싶고 잘해 보이고 싶고... 머릿속은 계속해서 복잡해졌다.
'그래, 내가 아쉬탕가를 하면서 진심으로 느끼고, 나누고 싶은 것에 집중하자'라고 마음을 다스리며 최근 느끼고 있는 호흡과 채화된 아사나로 마음이 집중된 상태로 흐르는 아쉬탕가. 이 두 가지에 집중하자라고 마음먹었다.
아직 첫 강의까지 시간이 있어 매일 아쉬탕가 수련을 하고, 구령도 붙여보고, 구성도 조금씩 바꿔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레전더리 아쉬탕기 존 스콧의 LED 수업(강사의 구령과 리드에 따라 행해지는 아쉬탕가 수업)과 인터뷰 영상을 보다 어느 순간 아쉬탕가 빈야사는 만트라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다.
티쳐의 반복되는 카운팅이 어느 순간 익숙해지고, 귀에 맴돌고 외워지며 마치 나무아미타불를 되뇔 때 집중되는 것처럼 것처럼 마음이 차분해진다. 또한 일정한 들숨과 날숨의 길이, 정해져 있는 시선 처리, 매번 동일한 시퀀스. 이 모든 게 굴러가며 집중의 상태를 만들고 움직이며 명상하는 것처럼 흐르게 된다.
혼자 아쉬탕가를 수련할 때 항상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했던 티칭이 귀에 맴돌았다.
'에캄 인헬 내쉬며 헤드 다운 마시며 헤드업 내쉬며 점프백 마시며 업독 내쉬며 다운독'
왜 그럴까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결국 이 반복되는 카운팅이 만트라처럼 내 귀와 마음에 익숙해져 내가 집중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내 수업의 수련자들과 나누고 싶어서 아쉬탕가 카운팅 연습을 계속하고 있고, 어떤 식으로 하면 잘 나눌 수 있을까 계속 고민하고 연습하다 문득 또 '아 내 ego 구나. 내가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고 있구나'를 알아차렸다.
샬라(Shala 산스크리트어로 home을 뜻하며 요가에서는 요가를 수련하는 공간을 뜻함)에서는 강사는 강사의 역할을, 수련자는 수련자의 역할을 할 뿐 모두가 동등하며 존중받으며 함께 가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은 사람도, 못한 사람도 없으며, 강사는 공간과 전체를 유지하는 역할을, 수련자는 수련을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의 깨달음을 수련자에게 가르쳐 그들도 이 깨달음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욕심부리고 있었다.
가르치려고 하니 부담감과 압박이 생기고 더 완벽해야 한다, 더 잘해야 한다는 욕심이 생겼다. 취미가 일이 되면 스트레스받는다고 하는 그 상태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강사로써 나의 롤은 깨달음을 주는 게 아니라 집중할 수 있는 상태와 환경을 만드는 것임을 다시 한번 되뇐다. 나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안내자일 뿐이다.
첫 수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부담감도 잘하려는 마음도 내려놓고, 함께 만들어가는 샬라 안에서 따뜻하게 수업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