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MBTI가 빠지면 사람을 논할 수 없는세상이다. 가장 최근 테스트 결과로 나는 'ESTJ'의 관리자형에 속하는데, 다양한 유형 중에서도특히나 'J'와 'P'를 비교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상세한 것까진 모르겠지만 간단히 P는 '인식형'이고 J는 '판단형'이라고 정의된단다. 예를 들자면, 어떠한 과제를 앞에 두고 P 유형은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지만 J유형은 시작일을 기점으로 계획을 세워 완성일까지 정해둔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서 보면 나는 거의 '트리플(Triple) J'에 속한다. 뭐든지 계획을 세워야만 하고 뭐든지 미리 마무리되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마음에 평안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에니어그램과 연결 지어 보자면, 나는 6번 유형의 사람이라 스스로의 '불안'을 인식하며 지내는 타입으로 늘 '안정'을 추구하기 때문에, 어떠한 과제가 제때에 끝나지 않음으로써 느껴지는 불안감을 견디지 못해 항상 미리 대비하는 것으로 정리가 된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나는 즉흥적으로 하는 것들을 참으로 싫어한다. 급만남도 그다지 달갑지가 않고, 갑작스러운 여행은 더더욱 싫다. 뭐가 됐든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맞닥뜨리는 것이 그렇게도 별로다. 물론 그것은 누구에게나 불편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나 같은 유형의 사람은 특히나 어렵게 느껴진다는 의미이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융통성에 취약하다.사람이 살아가는데 어떻게 준비된 상황에만 놓여 있겠는가. 예측 불가한 수많은 변수들에 유연하게 대처할 줄 알아야 하건만, 실로 세상 살아가며 나란 인간 정말 융통성은 밥 말아먹었구나 싶은 생각을 참으로 많이 하게 된다.
몇 년 전이었나...
이런 완벽주의 성향의 미리 준비충인 내가 남편과 술을 마시다 둘 다 살짝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아주 갑작스럽게 여행을 결정했다. 술도 들어갔겠다 이런저런 가정 경제의 상황이라던가 여행의 필요성 등등을 따져볼 정신 자체가 없었다. 그럴 때 나오는 단골 멘트도 적절한 안주로 등장했다.
그래! 인생 뭐 있냐! 까짓 거 여행 가자!
딱히 여유 자금이 많지 않던 시기였는데, 세상에 이런 걸 하늘이 주신 타이밍이라고 해야 할까. 바로 다음날 만기가 다가온 적금이 딱 대기 중이었다.(세상에 어쩜 그래) 그러려고 들었던 적금은 아니었건만 만기 해지된 그 돈은 고스란히 우리의 여행비용으로 탈탈 털렸다.
가뜩이나 여행에 필요한 모든 정보는 미리 찾아보고 비교해서 결정하고 차근히 하나씩 준비물을 마련하며, 여행지에서와는 또 다른 '여행 준비 기간 들뜸'으로 한껏 업되어 지내야 정상인 내가, 그다지 많은 준비를 하지 못한 채 며칠 뒤 우리는 이미 오키나와행 비행기에 올라 있었다.
갑자기 떠난 여행! 그래서 좋았나?
역시 지 버릇 개 못주고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안 하던 짓을 하면 필히 따르는 건 후회뿐이다. 원래 유연한 사람이 못되다 보니, 충분히 정보를 찾아 계획을 세우지 못한 채 현지에서 맞이한 상황들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일들이 많았다.
렌터카를 받으러 당도했을 땐 마침 점심시간이 다 된 상황이었는데, 식사 시간에 돌아가며 업무를 처리하는 우리나라와 최소 비슷한 상황을 기대한 건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건가. 하나둘씩 카운터에 앉아 있던 직원들이 사라지더니 급기야 전원이 식사하러 간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이 발생했고, 그곳의 직원들은 프랑스식 만찬을 즐기고 돌아오는 건지모두 함흥차사였다.하염없이 넋 놓고 앉아 두 시간 여를넘게 기다려 겨우 차를 인도받을 수 있었다.
숙소 주변 상황을 사실 잘 알아보지 않은 상태에서 비교적 지어진 지 몇 년 되지 않는 깔끔한 호텔이 가격도 괜찮고 너무 좋아 보여 그곳을 덥석 선택했는데, 도착해 보니 그곳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일단 주변 인프라가 너무 부실했고, 그나마 호텔 가까이에 위치한 '동네' 음식점들은 모두 영업을 '안'하거나, 하더라도 우리가 들어갔을 때 무반응이거나(그래서 멀뚱히 서있다 나왔다는 사실), 말도 안 되는 시간에 영업을 종료하는 곳들만 즐비했다. 이것은 진정 문화의 차이였을까?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out of 상식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오키나와는 미군 주둔으로 인해 스테이크가 그렇게도 유명하다기에 스테이크 집을 찾아 삼만리를 돌아다녔다. 저녁 식사를 하려고 몇 군데를 찾아다녔는데 오후 3시에 영업을 종료한 집이 꽤 많았다. 브레이크 타임이 아니라 당일 영업 종료였다.(아니 왜? 오키나와에서는 저녁 안 먹는 게 유행이었나?) 사전에 그다지 많은 정보를찾아보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우리의 구x 검색을 철석같이 믿었건만, 기가 막히게 문 닫은 집만 골라서 알려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결국 헤매다 마침 영업 중인 스테이크 집을 하나 발견해 일단 가자며 들어갔다. 어쩌다 얻어걸린 레스토랑에서 마주한 육즙 가득 너무도 맛있게 구워진 스테이크를 영접함으로써 나의 분노를 겨우 가라앉힐 수 있었다.(역시 난 고기에 약하다)
그렇게 철저한 준비 없이 떠났던 오키나와 여행은 요. 기. 나. 와.(욕이 나와)로 점철되었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일본의 편의점 신세계를 실컷 맛보고 돌아왔다. 그때 열심히 사 먹은 삼각 김밥 속 쌀이 제발 후쿠시마산은 아니었기만을 바라지만, 지금도 떠올리면진짜 눈물만 안 흘렸지 거의 (분노의) 눈물로 젖을 뻔한 삼각 김밥 속 밥알들이 다시금 장속에서 꿈틀대는 기분이다.
누군가에게는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움에서 얻는 즐거움이 더 클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역시나 생긴 대로 살아야겠단 다짐을 하며 돌아왔던 그때의 오키나와 여행! 다음에 또 찾아갈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만에 하나 다시 갈 일이 생긴다면 그땐 좋은 추억들로 리셋되면 좋겠다. 어쨌든 욕을 했을지언정 그러한 엉망진창의 여행 역시도 색다른 기억들을 남겨준 것만은 사실이다. 이렇게 이야깃거리가 생겼으니 말이다.
파워 트리플 J는 열심히 준비하며 희열을 느낀다. 결혼 10주년을 맞이한 올해는 3월에 정말 오랜만에 세 식구 여행을 계획 중에 있는데, 이미 하나둘씩 정보를 뒤적이며 마음은 하늘을 떠다니기 시작했다. 이 설렘을 한껏 즐기련다. 나는 '계획'있는 삶이 좋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