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 나, 다니엘 블레이크
켄 로치 감독, 데이브 존스, 헤일리 스콰이어스 출연, 2016년, 영국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실현하고자 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정책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하거나 집회·시위를 통해서, 혹은 언론에 의견을 제시하는 방법 등으로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고 설득한다. 자신의 주장을 공론화함으로써 실질적인 이익을 획득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인 권력이고, 민주주의는 이 권력의 분배와 사용을 중요하게 여기는 정치 체제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노숙자나 빈민처럼 자신의 처지를 알릴 적절한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 영세한 자영업자나 실직자들처럼 제대로 조직화되어 있지를 못해서 집단으로 주장을 펼칠 수 없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제대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회적인 약자들은 주목받지 못하고 투명인간 취급을 당한다. 변방으로 밀려나서 제일 약한 자리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떤 권리를 누리고 있는지가 우리 공동체가 달성한 인간다움의 정도를 보여주는 한 척도라고 한다면 과연 우리는 충분히 인간적이고 문명화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더불어서, 우리 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위하여 지식인이나 정치인이 마땅히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은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을 대신해서 그들의 목소리를 찾아주는 일이 아닐까.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는, 좋은 보건복지 제도를 가지고 있지만 예산 절감과 민영화를 최우선으로 하는 보수적인 정부에 의해서 많은 부분이 왜곡되고 관료화되어버린 영국에서 변방으로 밀려나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가난하고 약한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영화이다.
아무리 좋은 복지제도라고 하더라도 효율과 절감이라는 명분으로 왜곡될 때, 지원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복지는 더 이상 정당한 ‘권리’가 아니라 자신의 가난과 무능함을 증명해야만 얻을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시혜’로 변질되고 만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쓸모없고 게으른 사람 취급을 받으면서 자신의 존엄을 희생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가장 바닥 자리로 밀려나게 된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솜씨 있는 목수이지만 인터넷과 컴퓨터를 사용할 줄 모르는 데다 고집불통인, 그러니까 더 이상 지금의 제도에는 적응할 수 없을 만큼 구식이 되어버린 사람이다. 다니엘은 심장에 문제가 생겨서 질병 수당을 받으려고 하지만, 복잡하고 관료적인 절차와 컴퓨터를 사용해야 하는 조건 때문에 번번이 좌절한다.
그의 입장에서는 너무 복잡하고 분통 터지는 일이지만 다니엘은 그런 중에도 어떻게든 자신의 존엄을 유지하려고 하고, 비록 제도의 지원을 받아야 할지라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만은 포기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애쓴다. 그리고 역시 힘들고 어려운 이웃인 케이티와 그녀의 자녀들을 기꺼이 도우려고 한다.
하지만 원칙과 절차라는 명분으로 무장한 제도 앞에서 그의 삶은 점점 더 보잘것 없어진다.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고 또한 그 제도의 일선에서 일하는 하급 공무원들이나 계약직 사무원들의 잘못도 아니다. 제도를 그렇게 설계함으로써 혹은 설계하도록 사주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이들이 최종적인 책임자라고 하겠지만 그들은 너무 멀리, 너무 높이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고 영화에서도 역시 등장하지를 않는다.
그렇게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도 알기 어려운 상황에서 다니엘과 케이티, 그리고 케이티의 두 아이는 무너져가는 서로의 삶을 지탱하고 위로해 주는 유일한 친구가 되지만, 무심하게도 그들의 삶은 점점 더 극단으로 몰리게 된다.
특별한 영화적인 기교나 배경 음악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채, 켄 로치 감독은 그저 다니엘과 케이티의 무너져가는 삶을 거리를 두고 천천히 보여준다. 조금 더 선량한 사람들과 조금 더 냉정한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이 다니엘과 케이티의 삶을 본질적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가장 변방에 놓여있는 이들의 삶을 보듬지 못하는, 혹은 보듬지 않는 제도의 벽을 넘기에는 너무 힘이 모자란 주인공들이 허물어져 가는 과정만이 담담하게 보일 뿐이다.
전화로 질병 수당을 신청하거나 해당 부서의 담당 직원을 만날 때 다니엘은 자기 의견만을 앞세우며 예의나 배려 따위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서 진상이라 불리는, 악착같고 이기적이며 무례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영화를 보다 보면 ‘저렇게 밖에 못 받아들이나?’ ‘좀 더 유연하게 다른 방법을 찾질 못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배려나 예의, 한발 물러서서 양보하기는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자신의 생활에 더 유리한, 그러니까 타인에게 선량하고 나이스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평균적으로 득이 되는 사람들만 선택 가능한 전략일 수도 있다.
가진 자원이 별로 없어서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그때그때 자신의 몫을 챙기지 않으면 생존하기 힘든 사람들, 무엇이라도 악착같이 움켜쥐지 않으면 하루하루의 삶을 꾸려나가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예의나 배려를 요구하는 것, 그리고 그렇지 못한 이들을 ‘어쩔 수 없는 사람들’로 치부해 버리는 일은 좀 더 가진 자, 여유 있는 이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반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런 다른 대안이 없는 막다른 골목 끝에 서 있다면 과연 나라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물론 많이 가져서,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서 오히려 진상인 사람들은 정말 답이 없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 대부분은 조금의 재산과 학식을 갖추고 있으므로, 그렇게까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려 있지는 않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도 그런 이들이 엄연히 존재함을,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삶의 조건을 떠안은 채 그저 묵묵히 견뎌야 하는, 혹은 끝내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리는 이들이 있음을 잘 떠올리지 못한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조차 힘들게 하루하루의 삶을 꾸려 나가야 하는 형편에 나보다 힘든 다른 이들의 삶을 기억하고 연대하기를 요구하는 일이 쉽지 않기도 하고.
하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우리들 누구도 타인의 고통에 대해 완전히 무감한 채 혼자서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외딴섬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금은 타인의 고통과 현실에 대해서 돌아보라고, 우리가 누리는 것들이 과연 당연하기만 한 것인지 살펴보라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작은 변화라도 모색해 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고 영화 내내 다니엘은, 그리고 감독은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게 아닐까.
빈민, 비정규직 노동자, 노숙자 등 소외된 이들과 영국 역사의 이면에 놓인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우직하고 일관되게, 끊임없이 영화로 만들고 있는 자타 공인 좌파 감독인 켄 로치의 냉정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이 뭉클하게 와닿는 영화인데, 놀랍게도 이 영화를 찍을 때 켄 로치는 만 80세였단다. 이제 겨우(?) 50대 중반인데도 삶에 대한 열정이 흐물흐물 녹고 있는 필자는 그저 놀랍고 부끄럽기만 하다.
이 영화를 보게 된다면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고 살펴보기를 바란다. 더불어서, 영화에 입문하고 무려 50년 동안 자신의 시선과 입장을 고스란히 지켜 오면서도 상투적이지 않은 걸작들을 찍고 있는 이 젊은 노감독에게 경의와 존경을 보내는 일도 잊지 말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