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1 컨테이젼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로렌스 피시번, 주드 로, 케이트 윈슬렛, 마리옹 꼬띠아르, 기네스 펠트로, 맷 데이먼 등 출연. 2011년
페스트가 다마스커스를 향해 사막을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었는데, 대상을 이끌고 가던 추장이 앞질러 오면서 물었다.
“어디를 그렇게 달려가는가?”
“다마스커스, 천 명의 목숨을 앗으러 가지.”
다마스커스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페스트는 그 대상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추장이 말했다.
“네가 빼앗은 생명은 천 명이 아니라 오만 명이었어.”
“천만에.” 페스트가 말했다.
“나는 천 명만 건드렸고, 나머지 목숨은 두려움이 앗아갔지.”
-앤서니 드 멜로 지음/황애경 옮김, 개구리의 기도 제2권 초판 3쇄. 1998. 110쪽
2019년 겨울부터 시작해 온 세계를 뒤덮은 코로나19 사태로 개봉한 지 10년 만에 다시 주목받게 된 영화, 그래서 이미 많은 사람이 너무 잘 알고 있을 이 영화를 주제로 새삼 무슨 이야기를 쓸까 싶다가 문득 인도 관구 예수회 소속이었던 멜로 신부님이 쓰신 책에 나오는 저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다.
K-방역이 세계적인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많은 부분 사실이고 그 성과를 모두 폄하할 필요는 없지만, 질병이 아니라 공포와 편견이 해친 사람들은 헤아려 보지 않아도 좋은 걸까. 통계에 잡히지도 않고 언론에 나오지도 않는 무수한 피해들은 그냥 없는 것처럼 치부해도 괜찮은 걸까.
낯설고 두려운 존재를 처음 만날 때 공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감염병도 마찬가지인지라 영화에서 인류가 처음 경험하는 감염병인 MEV-1이 엄청난 속도로 번지면서 세상을 휩쓰는 건 감염병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빨리 번지는 두려움이다. 감염력도 치명율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실제로 그러하다면 너무 빨리 감염자가 죽어 버려서 대유행으로 번지지 못할 수도 있을 정도이다) 감염병의 유행은 순식간에 전 세계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슬프게도, 공포가 번질 때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가장 먼저, 가장 흔히 취하는 태도는 편 가르기와 다른 편을 박해하기이다. 코로나19 사태의 초기에 그리고 이후의 전개 과정에서 우리가 만들어 낸 편견과 그런 줄도 모르면서 미워하고 박해한 사람들을 떠올려 보라.
편을 갈라서 어느 한 편에 속하는 것, 내 편이 아닌 사람들을 악당으로 만드는 것은 어느 정도 심리적인 안전감을 제공해 준다.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동원하더라도 정치의 본령은 여전히 편 가르기인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적과 새로운 우리 편을 만들지만 편 가르기는 결코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방편이 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공포를 멈출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현실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이성의 힘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아니다. 방향이 없는 이성, 도구로서의 이성은 더 많은 공포와 혐오를 합리적으로 생산할 수도 있다. 나는 철학에 밝은 사람이 아니므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이성의 역할을 무시한 언사라고 비판하더라도 별로 반박할만한 지식이 없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대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도구적 이성의 위험성과 잔혹함은 20세기 이후의 대규모 전쟁과 그보다 작은 규모지만 끔찍함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을 수많은 지역 분쟁들로 넘치게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프리랜서 기자인 앨런 크럼위드(쥬드 로)는 이성적으로 공포를 이용해서 엄청난 돈을 번다. 어디 영화에서뿐이랴. 똑똑한 머리로 사람들의 두려움을 혐오로 만들어서 자신의 지위와 부를 지키고 확장하려는 사람들은 현실에서도 발에 채인다.
진실로 공포를 멈추는 것은 이타심이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타인과 자신의 안녕을 아울러 지키려는 의지이자 실천으로서의 이타심. 각자가 발휘할 수 있는 만큼의 이타심이 모여서 집단적 공포를 넘어설 때 창궐하는 공포를 멈춰 세울 수 있다.
영화에서는 역학조사관인 에린 미어스 박사(케이트 윈슬렛)나 바이러스 연구원인 엘리 헥스텔(제니퍼 엘) 같은 이들이 그런 이타심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거니와, 인류세 이래로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수많은 비극과 슬픔 속에서도 인류가 멸절하지 않은 것은 인류가 키워 온 이타심의 총량이 공포의 총량보다는 많기 때문이리라.
만일 인류가 멸절한다면 그건 운석이 충돌하거나 태양이 식어서가 아니라 인류의 공포가 이타심을 압도해 버렸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기후 위기이든 핵전쟁이든 인간이 스스로 자처한 비극이 벌어져서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우울한 전망이 결코 허황한 것만은 아님을 떠올리면 다시 우울해진다.
하지만, 오늘도 여전히 사람들의 삶이 계속되는 것은 이타심이 공포보다는 더 많기 때문이 아닌가. 세상에서 날마다 들려오는 슬픈 소식들은 우리를 한없이 절망하게 하지만, 실은 잘 보이고 들리지 않는 사랑의 실천들, 그러니까 아이를 입히고 먹이는 모든 부모들의 마음처럼 도무지 뉴스에 나올 법하지 않은 일상적인 이타심의 총합이 공포보다는 훨씬 더 많아서 세상이 이렇게 유지되고 있는 거고 그건 생각보다 훨씬 놀라운 일이다.
이타심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각자 스스로의 이타심을 개발할 수 있을 뿐 타인의 이타심을 개발하거나 실천을 강요할 수 없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세상이 이런 건 다 너 때문이야!’라고 끊임없이 남 탓을 해대는 수많은 손가락질 속에서도, ‘나는 오늘 무슨 착한 일을 했는가. 오늘 나는 어떤 동기로 나와 다른 이들을 대했는가’를 살피는 것, 그것만이 중요하지 않을까.
영화에서는 비교적 짧은 시간인 135일 만에 유행이 종식되지만 우리는 2년이 다 되어 가는 아직도 코로나19 유행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데, 이 사태 와중에 알게 모르게 키우고 있는 편견은 없는지, 그리고 그 편견을 성찰의 도구로 삼아 공포를 넘어 이타심을 향해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영화를 보면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연결해 주는 복선(伏線)을 발견하셨는지. 최초 전파자이자 사망자인 베스 앰호프(기네스 펠트로)가 근무했던 회사는 에임 엘더슨(Aimm Alderson)이라는 다국적 개발회사이다. 바로 그 회사가 개발을 위해 열대 우림을 밀어버리는 바람에 서식지를 잃은 박쥐가 밀집 사육을 하는 농장의 돼지와 접촉함으로써 최초의 바이러스가 만들어진다. 그 돼지를 요리해서 베스에게 판매하는 곳은 홍콩의 한 레스토랑이고, 위생 개념 별로 없어 보이는 중국인 요리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무분별한 개발과 기후 위기에 대한 적절한 알레고리이지만, 동아시아를 바라보는 편견 가득한 시각 또한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 영화의 처음과 끝을 보면서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들게 된다.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대유행을 다룬 또 다른 영화인 ‘아웃브레이크’에서는 그 악역을 한국 선원이 맡았다는 것도 새삼 떠오르고 말이다.
이름과 얼굴을 알만한 많은 스타 배우들이 나오지만, 예상과는 전혀 다른 역할과 분량인 것도 꽤 독특한(?) 느낌을 주는 영화이다. 감염병의 유행과 전파 과정을 정말 과학적으로 묘사해서 - 얼핏 보면 알기 어렵지만, 접촉과 비말 감염 경로를 보여주는 장면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 미국에서는 역학(疫學)을 공부하는 이들이 꼭 봐야 하는 영화로 꼽힌다는데, 어쩐지 지금은 영화가 현실보다 덜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