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스러운 기억, 무너지는 일상

영화 #4 더 파더

by 천생훈장


플로리앙 젤러 감독, 앤서니 홉킨스 올리비아 콜맨 주연, 2021년 개봉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어려워서 나도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는데 양자 물리학이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절대 불변의 고정된 사실처럼 인식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도 사실은 절대적인 게 아니라고 한단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식에 불변일 것처럼 와닿는 이 시공간은 그저 주어진 상대적인 객체일 뿐이라 상황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인식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와 그런 것도 알아내다니, 과학은 참 신기하고 놀랍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정말로 시간과 공간이 허물어져서 상대적으로 된다면 얼마나 오싹하고 끔찍한 일일지 상상하기도 싫다.

학창 시절에 치매나 인지 기능 저하에 대해서 배울 때 항상 나오는 증상이 ‘공간과 시간 지남력의 상실(place and time disorientation)’이었다. 치매가 진행됨에 따라 일반적으로 시간 지남력에 제일 먼저 문제가 생기고, 그다음이 공간 지남력, 그리고 사람 지남력이 상실된다고 한다. 그때는 어린 데다 공부할 것들도 많아서, 이 증상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도 잘 모른 채 무턱대고 외우기 바빴던 것 같다. ‘시간-공간-사람 순 지남력의 상실, 관련된 뇌 부위와 병변은 어쩌고 저쩌고...’

이제 세월이 이만큼 흐르고 보니, 교과서에 건조하게 기술된 저 증상이 얼마나 잔인하고 슬픈 것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사실은 나부터도 알게 모르게 시간 지남력이 떨어지고 있으니까.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서는 “우리 얼마 전에 만났지?”라고 물으면서 속으로는 한 서너 달 전에 만났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3년이 넘었다던가, 캠퍼스를 지나가는 데 낯익은 얼굴이 인사를 해서 반가운 마음에 “어, 자네 인제 몇 학년이야?”라고 물었더니, “내과 전공의 3년 차입니다”라는 답이 돌아온다던가 하는 경우들 말이다. 아마 나만 그런 것도 아니리라. 아직은 일상생활을 못 하거나 할 정도가 아니니 그냥 웃고 말지만, 말은 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결국 언젠가는 그런 시간 감각의 상실이 심각한 문제가 될 때가 오고 말 것임을 말이다.

영화 ‘더 파더(The Father)’에서 주인공의 시간과 공간은 그렇게 혼란스럽게 지나간다. 관객의 입장으로 영화를 보면서 ‘이야기 전개가 왜 이렇게 정신없지?’하다가, 얼마 후에 이 시공간의 뒤엉킴이 주인공 앤서니의 관점이라는 걸 깨닫게 되고, 그때부터 그 혼란스러움과 두려움에 갑자기 감정이입이 일어나게 된다. ‘치매에 걸려서 지남력이 상실된다는 건 저런 거구나’라는 탄식과 함께 말이다.

치매에 대한 많은 영화가 있지만, 인지 기능의 저하와 지남력의 상실이라는 전통적인 증상이 진행되는 과정을 이 영화처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그리고 일인칭의 관점에서 보여준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고집 세고 자의식이 강하지만 동시에 지적이고 독립적이었던(혹은 그랬을 법했던) 앤서니가 혼란스러워하면서 변해 가는 과정, 그리고 그를 둘러싼 환경이 안팎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이 두렵도록 사실적으로 제시된다.

때때로 괴팍하고 무례하기 이를 데 없고, 때때로 편협하고 종잡을 수 없는 감정과 행동을 보여주는 앤서니.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것이 치매의 증상임을 알고 있지만, 현실에서 같은 일을 겪는다면 당황스럽고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필자의 장모님과 부모님이 다 치매를 앓고 계신데, 영화를 보면서 안서니가 보여주는 모든 행동들에 기시감(Deja Vous)이 들었다. 상황과 정도는 다르지만 필자도 그런 감정과 행동의 변화, 그리고 쇠락해 가는 노년을 직접 목도하고 있으니까.

치매 증상의 진행은 안전하게 설계된 경사로처럼 완만하고 지속적이지 않다. 일정한 시기 동안 비교적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엔가 눈에 띌 정도로 증상이 훅 나빠진다. 그리고 또 어느 정도 안정기를 보내고 다시 툭 떨어지게 된다. 물론 안정기에도 아주 미세하게 증상의 변화가 있겠지만, 돌보는 이나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치 폭이 큰 계단을 내려서듯 진행이 된다.

영화에서 앤서니는 돌봄 간호사가 바뀌는 일이나 거주하는 공간이 바뀌는 것 같은 변화들을 혼란스럽게 인지한다. 어떤 에피소드들은 앤서니의 환각인지,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구별할 수도 없다. 하지만 본인이 그렇게 느낀다면 스스로에게는 엄연한 현실이 아닐까. 옆에서 지켜보는 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한들, 직접 겪는 환자 입장에서는 분명한 사실일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인지기능이 정상인 사람에게는 큰 변화가 아닐 수도 있는 일들이 치매 환자에게는 얼마나 충격적인 일인지를 실감하게 해주는 연출이다.


다행히 장모님과 부모님은 요양보호사와 가족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수고 덕분으로 지금의 상황에 비교적 안정적으로 적응하고 계신다. 그렇기는 해도 조만간에 또 다른 변화들이 생겨날 것이고, 본인도 그리고 가족들도 어떻게든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해야만 하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 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마조마해지지만, 삶이라는 계단을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내려가는 과정은 놀랍고도 숙연한 일이다. 결국 누구나 마지막에는 그렇게 삶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고, 영화를 보노라면 그 과정이 너무 길거나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1937년생이니 80대의 중반도 훌쩍 넘긴 배우 앤서니 홉킨스는 치매에 걸려서 혼란스러워하는 노인을 소름 끼칠 정도로 사실적으로 연기한다. ‘저런 연기를 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집중력과 총기가 있어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이다.

요즘은 평균 수명이 길어져서 다들 그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살지만, 그 장수함이 반드시 좋은 삶의 질과 비례하는 것은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는데, 연기를 하고 있는 앤서니 홉킨스를 보노라니, 그이의 다른 인생역정을 알지는 못하지만 저 나이가 되어서도 저토록 집중력 있게 자신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건 참으로 축복받은 일이라고 여겨졌다. 지적이고 집중력 있는 활동을 꾸준히 하면 치매를 예방할 수 있다는데, 배우도 그런 일 중의 하나인 걸까 싶다.


자신의 마음속에 꼭꼭 감추고 쌓아놓았던 것들이 치매가 오면 집착이나 행동으로 나타난단다. 그렇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잘 모르므로 만약 치매에 걸린다면 어떤 것들이 증상으로 드러날지 짐작하기 어렵다. 삶을 기쁘고 충만하게 잘 펼치면서 산 사람들은 치매에 걸리더라도 흔히 말하는 착한 치매로 지내게 된다는데, 바라기야 치매에 걸리지 않고 노년을 잘 갈무리하는 게 제일 좋겠으나 혹여 치매에 걸리더라도 그렇게 좋은 모습이었으면 싶기는 하다. 그러려면 지금 당장 여기에서 더 많이 기뻐하고 더 많이 내려놓으면서 살아야겠지.

치매에 걸릴지 어떨지는 내 소관이 아니니, 미래의 걱정은 미래에게 맡기고 그저 오늘 하루 더 온전하고 충만하게 살기를 애쓸 일이다. 사실은 그게 제일 어려운 일이지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