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과 색(성욕)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칼날에 묻은 꿀을 핥는 아이 같다
사람은 누구나 안정과 사랑을 원합니다. 부는 우리에게 안정감을 준다고 믿게 하고, 성적 욕망으로 얽힌 이성 관계는 누군가와 연결돼 있다는 위안을 줍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사람이 재물과 색(성욕)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칼날에 묻은 꿀을 핥는 아이와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구절은 불교 경전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매우 상징적인 비유입니다.
재물과 이성 관계는 분명 꿀처럼 달콤한 존재입니다. 돈이 있으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고, 좋은 교육도 받을 수 있으며, 외모를 가꾸거나 힘든 일을 대신 시킬 수도 있습니다. 여러 이성의 관심을 받으면 "나 꽤 괜찮은데?"라는 자신감도 생깁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유지하고 성취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욕망과 이성에 대한 갈망은 삶을 괴롭히는 수많은 문제의 뿌리가 되기도 합니다.
저는 출가하기 전, 선명상을 접하고 매년 여름과 겨울 절에서 스님들과 함께 집중 수행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반복적인 번뇌가 끊이지 않았고, 수행 중에도 마음속에서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수많은 계산들이 이어진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불유교경』을 읽게 되었고, 문득 깨달았습니다. 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수많은 번뇌의 뿌리는, 결국 내 욕망이 허용할 수 있는 선을 끊임없이 계산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율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다섯 가지 계율 중 세 가지부터 수지했는데, 신기하게도 계율을 받자마자 그동안 습관처럼 하던 계산이 자연스럽게 줄어들었습니다. "어디까지는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 사라지니, 머릿속이 한결 단순해지고 고요해졌습니다. 그것이 제가 체험한 계율의 실질적인 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뉴스에서 어떤 스님이 돈이 많다고 하면 곧바로 비난합니다. 어떤 스님이 이성과 부적절한 관계에 얽혔다는 기사가 나오면 서슴없이 손가락질합니다. 물론 그런 일은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계율의 핵심은 남을 판단하기 위한 잣대가 아닙니다.
계율은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따지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내 수행을 지켜주는 하나의 핵심 장치입니다.
사실 수행이란, 욕망이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바로 보고 그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물이나 이성에 끌리는 것은 그것이 주는 달콤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내가 중요하다'는 착각, '나는 사랑받고 있다'는 환상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이가 칼날의 꿀을 핥듯, 우리는 그 환상을 좇아 스스로를 다치게 만듭니다. 관계가 무너지고, 죄책감이 남으며, 때로는 삶 전체가 흔들리기도 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것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성현들도, 위대한 지도자들도 그 함정에 빠져 몰락한 사례가 많습니다. 그만큼 강력한 힘입니다.
우리의 욕망이 당장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계율은 욕망 앞에서 한 걸음 물러서게 해줍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점검하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을 지켜주는 방패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지금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유혹 앞에 서 있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 유혹은 참 달콤해 보이지만, 그 끝에 기다리는 결과는 아마도 알고 계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