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떨기 꽃이 되고 싶은 나에게

우울증 공황장애 환자의 연애 4

by 박모씨

꽃은 식물이 당장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전혀 필요가 없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광합성을 할 수 없으니 에너지를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물은 힘을 쏟아부어 계절에 맞춰 꽃을 피워낸다. 그리고 대부분은 꽃을 피운 후, 열매를 맺고 죽거나, 다음 해를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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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꽃을 참 좋아한다. 계절마다 만나는 길가의 이름 모르는 꽃들의 이름을 찾아내 불러주는 것이 취미다. 자연이 맺은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꽃을 피워낸다는 것 자체가 생명의 절정을 보는 것 만 같아서이다. 어차피 져버릴 꽃을 애써 피워 나간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잔잔한 감동이다.


그래서 죽음을 생각할 때도, 웃기지만 장례식에 어떤 꽃을 가져나 놓으면 좋을지 먼저 생각해보곤 한다. 다음 생에 꼭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꽃나무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오동통한 동백나무도 좋을 것 같고, 나는 음료를 좋아하니까 물을 좋아하는 수국도 괜찮을 것 같다. 누군가 꽃나무가 된 나를 보고 나처럼 잔잔한 감동을 받는다면 그걸로 족하다.


나의 전 애인이자 첫 번째 남자 친구는 꽃 선물을 절대 해주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아무리 좋아하든 간에 꽃은 시들고 나면 가치가 없어지니 쓸모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사귄 지 100일이 되는 날에 꽃 선물을 해달라고 했더니 조화를 한 송이 선물해 줬었고, 사귄 지 6개월이 넘어서 해외여행을 3주 정도 다녀오면서 돌아올 때 마중을 나온다고 하길래 꽃을 선물해 달라고 했었는데 그마저도 까먹었다고 했다. 꽃 선물을 받고 싶어서 울면서 애원을 해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의 최선은 말라도 그대로 유지되는 안개꽃이었다. 그는 학교 졸업식 때에도 꽃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아예 그를 데리고 꽃시장에 갔다. 꽃시장에 가서 그가 납득할만한 저렴한 꽃을 사달라고 해서 신문지에 싸서 포장한 뒤 집에 들고 왔다.


그런 그와 헤어지고 난 후, 내가 제일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혼자서 꽃시장에 간 것이었다. 거기에 가서 평소에 비싸서 엄두도 내지 못했던 작약을 한 단 샀다. 풍성하고 예쁜 연분홍빛의 작약을 꼭 한 번 받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작약을 화병에 꽂고 나는 한참을 울었다. 내가 그냥 내 돈을 주고 사면될걸, 나는 왜 그 오랜 세월 동안 안 되는 걸 되게 하려고 노력했는지 나 자신이 불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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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그 뒤로 매달 꽃시장에 가서 제철로 나오는 예쁜 꽃들을 한 단씩 사서 집에 들고 왔다. 살이 빠지고 당장에 죽을 것 같은 순간에도 매달 꽃 사는 것은 잊어먹지 않았다. 일을 쉬는 와중이었기 때문에 형편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꽃 한 송이만큼은 내 곁에 뒀다. 힘들게 생을 연명하는 나를 위한 선물이었다.


그러다가 어쩌다 보니 지금 남자 친구에게도 꽃을 선물했다. 나는 시장에 가서 꽃을 한 단씩 사 오는데, 양이 많으니 너도 이걸 들고 가서 집에서 보라고 했다. 소국과 천일홍, 미스트 블루를 선물해줬었다. 그는 참 고마워했다. 보통 남자들이면 꽃 별로 안 좋아할 텐데,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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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어쩌다 보니 그와 함께 꽃시장에 갔다. 함께 꽃을 사고, 구매한 꽃을 그에게 나누어주었다. 크리스마스에는 그가 나에게 장미꽃을 한 송이 줬다. 나도 면접 합격을 하고 난 뒤, 평소에 하고 싶었던 꽃꽂이 수업을 듣고 만든 작품을 그에게 주었다. 그때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며칠 뒤에 이사를 해야 했는데, 버리느니 누군가에게 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가 취직을 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도 우리는 꽃시장에서 만났다. 함께 간 두 번째 꽃시장에서 그가 날 좋아한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아무리 꽃을 좋아한다고 해도, 꽃시장에 여러 번 같이 온다는 게 뭔가 이상했다. 이 사람이 꽃만 보러 오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 뒤로 거의 세 달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나는 정말이지 살아있는 게 용한 정도인데, 저 사람은 그런 날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걱정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작약 한송이를 주며 다음번에 만났을 땐 연인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 어린날의 사랑의 끝이었던 작약을 내밀며 그는 다시 사랑의 시작으로 받아달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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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묘했다. 싫지만은 않았다. 내가 내심 그의 고백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알겠다고, 너와 만나겠다고 했다. 내 생각이 나서 사 왔다는 그 예쁜 꽃에 기뻤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함께 좋아해 줄 거란 생각에 그의 구애에 승낙했는지도 모른다.


그 뒤로도 남자 친구는 나에게 여러 번의 꽃 선물을 해줬다. 내가 병원 치료가 끝나갈 것 같다고 하자 스타티스를 선물해줬고, 나를 만나러 올 때 꽃시장에 들러 장미를 한 단 사 오기도 했고, 나와 함께 꽃시장에 가서 꽃을 왕창 사 오기도 했고, 겨울이라며 라넌큘러스를 한 단 사주기도 했다. 길을 가다 꽃이 보이면 꼭 사진을 찍어 나에게 보내줬다. 궁금하지도 않을 텐데 꽃의 이름을 꼭 나에게 물어봤다. 그와의 만남은 처음 순간부터 이렇게 한송이 송이 꽃으로 기억되고 있다.


꽃을 누군가에게 준다는 것은, 그곳에 담긴 생명을 누군가에게 주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준 한 떨기 꽃이 뿜어내는 생명을 마시며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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