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시 돌아갈래~
겁이 없는 편이다. 비위도 다소 강한 편이다. 회사 후배와 태국 패키지여행 중에 들렀던 뱀농장에서 현지 가이드가 건네었던 왕코브라의 '건조 쓸개'를 한입에 덥석 삼켰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 무던한 척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까탈 떨며 신경 쓰이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극내향 예민 성향이었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빼는 일이 없었다. 곱게 자란 부잣집 막내딸 같은 이미지고 싶었지만 결론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해외에서 살다 보면 먹는 게 마음처럼 쉽지는 않다. 우선 치앙마이는 소고기가 귀하다. 로컬 소고기는 너무 질겨서 맛이 없고 호주산이나 일본산 수입산은 우리나라보다 비싸다. 무엇보다 불고기나 국거리처럼 우리 식문화에 맞춰 손질된 고기가 없고 대체용으로 쓸만한 샤브용 고기는 열 점도 채 들어있지 않지만 비싼 몸값을 자랑한다. 게다 치앙마이는 북부 쪽에 위치해 해산물도 풍부하지 않고 덜 신선한 편이다. 그러니 매일 식탁은 돼지 닭 돼지 닭 반복이다. 매끼를 한식으로 해 먹자니 품도 들고 식비도 만만치 않아 한 끼 정도는 외식을 한다.
다행히 태국 음식은 입에 잘 맞는 편이라 쏨땀이나 팟타이 같은 친숙한 태국 음식 외에도 대체로 가리지 않고 먹는다. 며칠 여행할 거라면 입맛에 맞는 음식만 조금씩 골라 먹다 가면 그만이지만 반만 여행자 신세라 현지 음식을 가려 먹기 시작하면 정말 갈 곳이 없어진다. 식당에 가면 옆 테이블을 흘긋거리다 처음 보는 음식이 보이면 도촬(?)해 두고 다음에 시켜 먹기도 한다.
어느 날 싼캄팽 온천을 갔다. 이곳은 치앙마이 사람들의 대표 가족 여행지로 시냇물처럼 흐르는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그냥 하루 종일 뭔가를 먹다가 오는 그런 곳이다. 각종 먹거리도 파는데 단연 인기는 쏨땀. 이곳에 오면 누구나 펄펄 끓는 유황 온천에 댤걀을 삶아 먹는데 이걸 쏨땀과 함께 먹으면 삼겹살과 파김치처럼 아주 찰떡궁합이다. 쿠폰을 사서 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쏨땀을 주는데, 가만 보니 외국인인 나에게는 흔히 우리가 아는 하얗고 새콤달콤한 쏨땀을 주고 현지인들에게는 조금 새까만 쏨땀을 주는 게 아닌가. 다음에 그곳을 방문했을 때도 똑같은 일을 겪어 물었더니 '쏨땀 뿌빠라'라는 것이라고. 현지인들이 줄을 서서 사가는 그것을 나만 모를 수는 없었기에 과감히 나도 그걸로 달라고 했다. '뿌빠라'에는 삭힌 작은 게가 들어있는데(태국어로 '뿌'가 게라는 뜻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멸치나 황석어 젓갈처럼 곰삭은 향이 난다. 젓갈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뒤로 어딜 가든 그냥 쏨땀 대신 '쏨땀 뿌빠라'를 외치게 되었다. 그러면 '너는 이걸 어떻게 알고 먹냐'며 태국어 질문이 폭포수처럼 쏟아졌지만 그럴수록 나만 아는 맛있는 음식을 시켜 먹는다는 흐뭇함이 더욱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구글맵 서치를 하다가 덜렁 별 하나가 달린 어느 식당 리뷰에 뿌빠라 사진이 올려진 걸 보게 되었다. 식당의 위생을 크게 문제 삼는 내용이었는데 뿌빠라에 파리알이 가득했다는 내용이었다. 앗뿔싸! 언젠가 내가 먹었던 뿌빠라와 상태가 같았다. 어느 허름한 로컬 식당에서 시킨 뿌빠라에 작고 가는 꽃술 같은 것이 낱낱이 들어 있길래 내가 잘 모르는 현지 채소 속에서 나온 건 줄 알고 부지런히 주워 먹었더랬다. 그런데 그것이 파리알이었다니!!! 원효대사가 해골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런 기분이셨을까. 속이 너무 좋지 않아 점심때 후식으로 마셨던 오렌지 주스가 목구멍까지 역류해서 올라왔다.(글을 쓰는 지금도 속이 안 좋은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나 울어~) 알고 봤더니 환기와 냉방 모두 쉽지 않아 부엌이 거리 쪽으로 난 로컬 식당에서는 겨울 지나 우기가 오는 시점에 그런 일들이 종종 있다고 한다. 특히 뿌빠라에 들어가는 삭힌 게나 생선 같은 재료는 파리들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 중 하나라는 사실도.
나의 뿌빠라 사랑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마음이 지옥이면 지옥, 마음이 천국이면 천국' 타령을 하는 글을 자주 올린 바 있지만 어디까지나 마음 수양의 차원이었지 이렇게 몸으로 독하게 체험하게 되길 원하진 않았다.
그 후로 지금까지 조금 지저분한 로컬 식당은 가지 않고 도무지 재료 파악이 잘 되지 않는 음식도 피하고 있다. 음식을 먹기 전 뒤적이면서 검열하고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재료는 따로 골라 놓는다.(몸에 베인 알뜰함(?)으로 음식을 통째 안 먹는 건 아니다.) 또 식당에서 사람들이 먹는 특별식을 따라 시키는 '현지인 코스프레'도 그만두었다. 드디어 의도치 않게 곱게 자란 '막내딸 코스프레'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노릇을 오롯이 혼자 목격하고 있는 남편은 오늘도 점심을 먹으면서 말한다.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해."
영화 <박하사탕>의 설경구처럼 이 연사 힘차게 외친다.
"나 다시 돌아갈래~~(파리알이 어떻게 생겼는지 조차 몰랐던 '원래'로...)"
하지만 시간 여행을 할 수 없고 파리알은 알아 버린 한낱 나약한 인간일 뿐인 '이 연사'의 외침은 공허하다. 그러다 괜히 죄 없는 남편만 한번 앙칼지게 째려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