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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한 여행 최고!

여행에 빈틈을 허락하세요

by Jane C

망한 여행 한번 어떠세요?



치앙마이에서 거주인으로 살다 보면 자연스레 여행객을 많이 마주치게 된다. 특히 작년부터 올해 초까지 치앙마이를 찾는 해외 관광객 1위가 한국인이었다고 하니 관광지는 물론 쇼핑몰에도 한국들이 가득하다. 우리가 처음 치앙마이를 찾았던 2016년만 해도 한국인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반면 요즘은 연세 있으신 분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가득 오실 정도로 치앙마이는 핫플이 되었다.


다양한 한국인들을 보다 보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 있다. 바로 대부분 J라는 것! MBTI의 J를 말하는 것 맞다. MBTI를 검사해 보지도, 그래서 스스로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는 자가 이를 거론하기는 좀 뭣하지만 서당개 풍월을 읊어보자면 일단 J는 '계획형'이다. ChatGPT에게 물어보니 J의 여행 계획은 세부 일정을 미리 짜고 예약도 모두 끝내놓는 스타일이라고 답한다.


쇼핑몰이나 유명 음식점에 있다 보면 본의 아니게 옆 테이블에 한국인들의 대화를 듣게 된다. 다들 무슨 치앙마이 여행 해답지라도 보고 온 것처럼 일정을 비슷하게 얘기할 때가 많다. 예를 들면 올드타운에서는 블루 누들을 먹고 바트 커피에서 커피를 마시고 맞은편 소품샵을 구경하고 왓 치앙만을 구경하다 쿤캐 주스에서 주스나 스무디볼을 먹어야 한다는 식이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대부분 짧은 여행 일정을 두고 온 탓이다. 한국인이 어떤 민족인가. 신속과 효율성의 민족 아니던가! 짧은 일정을 맛없는 음식을 먹고 불필요한 장소에서 보내며 시간낭비를 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을 누구나 했을 것이다. 하긴 나조차도 하도 들어 외우고 있는 올드타운의 저 여행루트는 실패할 확률이 제로에 가까운 계획이긴 하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좋았던 것이 꼭 나에게도 좋은 것은 아니다. 내가 본의 아니게 엿들었던 맛집 중 하나가 마야몰 4층 푸드코트 '문신남 팟타이'였다. (팟타이를 만드는 남자가 문신이 가득한 팔뚝으로 웍을 돌려서 그리 불린다.) 마야몰을 참새 방앗간 드나들 듯 다녔지만 낯설어 찾아봤더니 실제로 포털사이트에 치앙마이 문신남 팟타이를 치면 많은 블로그가 검색되었다. 그리고 먹으려 하였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는 블로그도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하루는 나도 시켜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주 실망스러웠다! 간이야 사람마다 다르니 그렇다 쳐도 굳이 따지자면 웬만한 로컬 음식점에서 맛볼 수 있는 팟타이보다 조금 더 맛없는 수준이었다고나 할까. 혹시나 해서 다음에 가서 또 한 번 먹어 봤더니 전에 먹었던 맛과 또 다르게 볶은 정도도 간도 들쭉날쭉이었다. 물론 푸드 코트의 음식들이 대다수 그런 편이니 그러려니 하고 그냥 먹으면 된다. 하지만 이런 곳이 '팟타이의 성지'로 잘못 알려져서는 조금 곤란하다. (실제로 먹고 난 후기에도 '평범했다'는 얘기도 많았다.) 오히려 다른 이의 여행담을 듣고 그대로 따라 하기보다는 이왕 저렴하고 다양한 음식이 가득한 푸드 코트에 왔으니 평생 먹어보지 못할 새로운 음식들을 도전해 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참고로 가장 최근 소식을 전하자면 그 '문신남' 대신 볼에 피어싱을 한 어떤 아가씨가 웍을 더 자주 돌리던데 '피어싱녀 팟타이'로 바꿔 불릴려나.)




임신 6개 월에 출산 전 여행으로 발리를 갔다. 원래 여행 계획은 남이 세워주는 것인 줄로만 알고 있는 남편과 쌍둥이 임신으로 배가 그야말로 남산만 해서 숨쉬기만 겨우 하고 있는 내가 달랑 여행책자 한 권만 들고 떠난 대책 없는 'P'들의 여행이었다. 첫날 숙소 앞 번화가 구경을 나갔는데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급한 대로 우비를 사 입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길은 어둡고 배는 무겁고 비는 무섭게 내리고 택시는 안 잡히고 분명 숙소는 코 앞이었는데 걸어도 걸어도 멀게만 느껴지고 그야말로 환장의 대파티였다. 그렇다. 다들 기피한다는 발리 우기 한가운데 여행 일정을 잡은 것이었다!

그다음 날부터는 가까운 곳만 차로 잠시 다녀오고 호텔에서 대부분 보내기로 했는데 여행책자를 보니 발리의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가 '덴파사르'라고 한다. 덴파사르는 관광객들이 많이 머물고 있는 지역인 스미낙이나 꾸따 반대 방향에 있어 차로 좀 가야 했지만 '중심지'라는 단어에 현혹되어 택시 기사에게 무작정 책자를 들이밀고 'go'를 외쳤다.

하지만 소통이 잘못되었던지 기사가 내려준 곳은 광활한 도로가 펼쳐진 광장 한가운데! 여기가 덴파사르냐고 했더니 맞단다. 비유하자면 서울 시청 광장에 내렸는데 사방 아무것도 없고 도로는 강남역 사거리만큼이나 넓은데 차는 경북 영양군만큼이나 없었다고 생각하면 된다.(아직도 그곳이 어디였는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구글맵을 보니 광장을 조금만 가로질러 가면 무슨 시장 같은 게 나올 것 같기도 해서 걸으려는데 갑자기 배가 단단하게 뭉쳐오는게 아닌가. 평소에 단 한 번도 배가 뭉친 적이 없었던 데다 다들 만삭이냐고 물을 정도로 배가 많이 불러 있었던 터라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발리의 119는 몇 번일까를 궁금해하며 '덴파사르'라고 불리는 너른 광장의 장식석에 앉거나 혹은 반쯤은 누워 있는 나를 한참이나 남편이 문질렀다. 그리곤 배가 풀리자마자 우린 발리의 문화와 역사의 한쪽 귀퉁이조차도 구경 하지 못한 채 가까스로 택시를 잡아타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덴파사르는 일종의 '구'와도 같은 지역이라 콕 집어 유적지나 식당 등을 말했어야 했는데 아무 생각 없는 P들을 또한 아무 생각 없던 기사가 그야말로 '서울 한복판'에 내려다 놓은 식이었다.





남편과 나에게 덴파사르는 '다녀왔지만 다녀오지 않은 곳'으로 남았다. 하지만 발리 여행을 추억할 때 최고는 '덴파사르'였다고 아직도 둘이 깔깔 거리며 웃는다. 차도 다니지 않던 광활한 광장에서 금방이라도 애가 나올 것 같은 여자가 너른 돌 위에 누워있고 그 옆에 안절부절못하며 배를 마사지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라니! 이 위험천만해 보이는 광경은 철도 없고 계획도 없고 생각도 없었던, 대신 지금보다 있는 거라곤 한 톨의 젊음이었던 순간의 소중한 페이지로 남았다.




치앙마이를 여행 오시는 분들께도 한 번쯤 '망한' 여행을 권해본다. 패키지여행 못지않게 빽빽한 일정표를 들고 있으신 분들도 가끔 볼 수 있는데 하루는 그 일정표를 살포시 접어보시길 추천드린다. 그냥 하염없이 거리를 걷다 현지인들만 있는 식당에 들어가서 대충 눈치로 음식도 한번 시켜 드셔 보시길. 다리가 아파 우연히 보석 같은 카페를 찾게 되는 행운도 얻게 되시길. 골목 안에 작은 소품샵을 발견했는데 컬렉션도 훌륭하고 가격도 저렴해 한가득 득템해 가시길. 그러다 양손에 짐이 한가득 생겼는데 역시 우기답게 비가 내려 쫄딱 맞게 되기를. (여기서 최고의 피날레는 하필 가방이 '종이'여야 한다!)


10년 후 치앙마이를 떠올릴 때 가장 웃음이 나올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 감히 장담드린다!



I don't know

where I'm going

from here

But I promise it

won't be boring!



Photo: Logan We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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