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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 하다 채식주의자 선언

채식주의자를 위한 도시, 치앙마이

by Jane C

나는 원래 자타공인 '꿀피부'였다. 에디터 시절 함께 화보 출장을 갔던 모 여배우가 나에게 피부 비결을 물어왔을 정도로.(물론 인간성이 좋기로 유명한 배우라 예의상의 말이었겠지만 그때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아직도 그 여배우는 나에게 내적 친밀감이 무척 높은 사람으로 남아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뾰루지 한번 나질 않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아무 싸구려 화장품이나 막 발라도 얼굴에 늘 광이 돌았다. 컬러상 비록 '백옥'은 아니었어도 '갈옥褐玉'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시작부터 자화자찬을 밑밥으로 까는 이유는 화양연화에 대한 서글픔이다. 지금 내 얼굴엔 이마부터 턱까지 발긋발긋한 알레르기가 가득하니 말이다. 8년 전쯤 양볼에 작은 뾰루지가 나기 시작하더니 온 얼굴을 덮었다. 알레르기 검사를 해도 특별한 인자가 나오지 않았고 5년 넘게 피부과를 다니면서 각종 스테로이드 약을 먹어도 도무지 차도가 없었다. 게다 엎친데 덮진 격으로 몸에도 알레르기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화전처럼 등 피부를 새까맣게 태워 변색시키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알레르기에 좋다는 유산균과 달맞이 종자유를 거의 들이 붙다시피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밀가루와 알코올도 완전히 끊었다. 하지만 알레르기는 도무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한의사님의 블로그에서 갖은 방법으로도 낫지 않는 알레르기의 원인은 '심장의 열', 즉 화병이 원인일 수 있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그때 문득 떠올랐다. 어머님의 황당하고 무례한 언사 아래 불합리적이지만 강제되었던 며느리 역할을 할 때마다 가슴 안쪽이 뜨겁게 싸하고 쓰려오던 감각을. 일찌기 부처님이 괜히 진화선소심(瞋火先燒心: 분노는 남보다 나를 먼저 태운다. 부처님~대체 왜 틀린 말씀이 하나도 없으신 건가요!)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한여름에도 수면 양말을 신고 있어야 할 정도로 수족 냉증이 심한 전형적인 '소양인'임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사그라들지 않는 화로 인해 심장과 나아가 피부까지 활활활 타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내 목표 중 하나는 알레르기 없애기다. 하지만 열을 분산시키기 위해 열심히 테니스도 쳐보고 이너피스를 찾기 위해 때때로 명상도 해보지만 여전히 차도가 없다. 그러던 중 얼마 전 모델 켄달 제너가 유제품을 싹 끊고 만성 여드름 피부에서 벗어났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실제로 유제품은 알레르기 유발 1위 요인으로 꼽히곤 한다. 평소 우유는 마시지 않지만 치앙마이에 와서 과일 요거볼을 즐겨 먹고 있었던 것이 맘에 걸렸다. 그래서 요거트를 대체할 만한 식품을 찾기 시작했다.

막상 찾기 시작하고 보니 이곳엔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두유를 비롯해 코코넛 밀크, 캐슈너트 밀크, 오트 밀크 등을 발효시켜 만든 다양한 식물성 요거트가 있었다. 또 마카다미아 밀크, 피스타치오 밀크 등 우유를 대체할 식물성 밀크의 종류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치앙마이를 '비건을 위한 도시'라며 한국에 갈 때 기념품 대신 이런 특별한 식물성 밀크를 사가지고 갔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다양한 맛의 소이거트와 캐슈거트. 그리고 마트나 쇼핑몰, 하다 못해 재래시장에도 샐러드바가 있다. 비건들 소리 질러~~!!





'이 참에 나도 채식 한번 해볼까?'


마침 마크로(누군가는 태국의 코스트코라 일컫는데 그 정도는 아니고 식자재 마트 정도의 느낌이 나는 대형 슈퍼 체인이다.)에서 보쌈용 삼겹살을 고르다 돼지 X꼭지를 적나라게 보고 나서 육식이 싫어지던 찰나였다. 또 우기라 덥고 눅눅한 날씨가 이어져 기운도 없고 입맛도 없어 가볍고 상큼한 것이 먹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알레르기에도 좀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왠지 기분상!


주요 식단을 명란 아보카도 낫또 덮밥으로, 아침은 삶은 달걀과 소이거트, 과일로 정하고 채식을 시작했다. 점심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치앙마이에는 정말 많은 채식 레스토랑이 있었다. 구글맵에 대충 성의 없게 'vegetable restaurant'라고만 쳐도 대략 20개 이상의 식당이 검색되어 나온다. 또 많은 일반 식당에서는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메뉴를 따로 두고 있기도 하다. 하루는 이곳에서 유명한 독일 뷔페에 갔는데 다양한 대체육 메뉴가 있었다. 특히 플랜티드 오리 구이는 정말 모양까지 완벽하게 오리고기 같아 놀라웠다! 또 쇼핑몰 푸드 코트에 가면 비건용 월남쌈이나 토르티야 등도 쉽게 볼 수 있고 하다못해 동네 요일장에만 가도 갖가지 채소를 보기 좋게 손질해 놓은 샐러드바가 있어 어디서든 외식하기에 전혀 어렵지 않았다. 정 먹을게 없으면 태국 대표 음식인 팟타이나 쏨땀, 로띠만 먹어도 완벽한 채식단이 된다. 다양한 인종이 사는 치앙마이는 그야말로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천국'이었던 것이다!



남들은 채식을 하면서 몸이 가벼워졌다고 하던데 이제 두 달 남짓 시도하고 있는 나는 오히려 체력이 좀 떨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슬프게 알레르기도 아직 그대로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채식 생활을 어렵게 하는 것은 채식의 미진한 효과가 아닌 '애미' 역할. 아이들을 위한 제육볶음을 하다가 살짝 간을 보고 항정살을 굽다가 익었나 하나 집어 먹기도 한다. (이래서 채식 효과가 미미했던 것인가 하는 섬광같은 자각이...)얼마 전에는 샤부샤부 간을 보기 위해서(...라는 변명으로) 얇은 삼겹살 2점을 배추 밑장 깔기를 해서 집어 먹다가 눈치 빠른 딸내미에게 딱 들키고 말았다.


"(당황)... 이것도 채식이야. 플렉시테리안이라고 들어봤나 몰라. 아주 가끔씩만 소량 육식 하는 거야."

"엄마 채식 그만하고 고기 많이 많이 먹어요. 난 엄마가 살 좀 찌고 더 건강해졌으면 좋겠어요."

"....."


우리의 얄팍한 신념은 이따금 뜨거운 진심 앞에서 쉽게 무너지곤 한다. 맘 편히 라면 하나 빵 한쪽 먹지 않더니 급기야 채식을 하겠다며 소처럼 상추쌈만 우걱대는 엄마를 보는 일이 아이에게는 꽤나 염려스러웠던 모양이다. 이 날 나는 더 이상 밑장 깔기를 하지 않고 양껏 대패 삼겹살 샤부샤부를 먹어 보였다.



김한민 작가는 <아무튼, 비건>이라는 책을 통해 한 사람의 완벽한 비건보다 다수의 사람을 '비건적'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전문가의 말을 인용한 바 있다. 실제로 채식에 관심을 갖고 난 후부터 이전에는 아예 생각도 없었던 동물 복지나 육식과 환경 오염의 상관 관계에 대한 자료를 종종 찾아보곤 한다. 나의 채식주의자 선언은 아마도 헐렁한 플렉시테리안에서 페스코 베지테리언 사이를 변덕스럽게 오고 갈 테지만 '비건적' 인간이 되기로 결심하고 아주 극소량의 효율적 성공을 성취하고 있는 것에 아주 극대량의 의미를 두기로 마음 먹는다. (비건의 종류가 이토록 다양한 것이 어찌나 다행인지!)



오늘도 비건 파라다이스, 치앙마이에서 망설임 없이 플레인 요거트 대신 소이거트를 고른다. 나의 '비건적' 라이프를 응원하며!(라고 쓰고 알레르기 퇴치를 위하여!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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