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시계태엽 오렌지>의 작가 앤서니 버제스마저도 이렇게 진부한, 그러나 이보다 더 정확할 수 없는 표현으로 '입막'하게 만든 과일은 바로 두리안이다. 누구에게는 과도한 사랑을, 누구에게는 지나친 미움을 받는 양극의 과일 두리안. 치앙마이는 지금 막 두리안의 계절을 지나고 있다.
한 곳에서 1년을 살아가는 장점 중 하나는 그곳의 제철과일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동남아는 그냥 더운데 무슨 제철이 있냐 싶지만 여기에도 미세한 기후 변화가 있다. 그 안에서 우리가 잘 아는 망고, 망고스틴부터 조금 낯선 마용칫까,석가까지 갖가지 과일들이 자신들의 순서에 맞춰 차례차례 영글어 간다.
두리안은 우기인 6월~8월이 철이다. '과일의 왕'이라 불리는 이유는 탄수화물, 단백질까지 뭐하나 부족함 없는 영양덩어리라는 점도 있지만 원체 비싸기 때문이기도 하다. 몇 년전 겨울에 왔을 때는 작은 것 하나를 천 밧 가까이 주고 사 먹은 적도 있지만 제철인 지금은 킬로당 백 밧대로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 중국에서 워낙 수요가 많아 이보다 훨씬 더 높은 가격이었지만 코로나 전후로 필리핀이나 베트남에서도 대량 재배를 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태국 두리안 가격이 많이 떨어졌다고 한다.
어쨌든 착해진 가격 덕분에 신이 난 남편은 1주일 2 두리안을 실천중이다. 문제는 남편을 제외한 모두가 두리안을 싫어한다는 점. 손질한 두리안을 냉장고에 넣어두면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온 집안에 은은하게 냄새가 퍼지니 아이들은 코를 막으며 질색팔색한다. 그렇다고 남편에게 그만 좀 먹으라 잔소리할 수는 없다. 어쩌면 평생에 몇 번 없을 호사일테니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 마크로에서 산 두리안을 집에 와 확인해 보니 딱딱한 것 아닌가. 두드렸을 때 아무리 잘 익은 수박같은 소리가 났더라도 껍질을 깔 때 손으로 눌러 직접 확인하지 않은 우리의 잘못이었다. 과일은 후숙이 되기도 하니 김치통에 잘 넣어 상온에 이틀정도 두었다. 아차! 껍질을 벗긴 두리안은 절대 후숙 되지 않고 잘 익지 않은 두리안의 맛은 생밤과도 같다.(... 는 걸 결코 알고 싶진 않았다. 나 울어~) 그 후로도 몇 번 두리안을 사려 시도해 봤지만 그럴싸한 소리만 울릴 뿐 막상 알맹이는 설익은 것만 걸렸다. 끝물이었다.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자주 가는 요일장에서 여태껏 샀던 것 중에 가장 크고 잘 숙성된 것으로 고르고 골랐다. 하지만 혼자 먹기엔 너무 무리였던지 커다란 덩어리를 하나 남겨두고 남편은 두리안에 항복을 선언했다. 남겨진 덩이는 씨를 발라 냉동실로 보내졌고, 비로소 두리안의 계절은 끝이 났다.
'투리토프시스 도르니(Turritopsis Dohrnii)'라고 하는 작은 해파리가 있다. 이 해파리는 '불멸의 해파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데 자연적 노화로는 절대로 죽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일반적인 해파리는 수정란에서 유생, 폴립 그리고 메두사(성체 해파리) 단계를 거쳐 노화로 죽는데 이것은 스트레스 상황_노화나 손상, 영양 부족 등의_에 처하면 성체에서 다시 폴립 단계로 되돌아간다. 쉽게 말해 '네버엔딩' 스토리다. 의학계와 과학계는 앞다투어 불멸의 해파리로 영생과 회춘을 연구 중이고 실제로 2022년에 스페인 오비에도 대학 연구진이 이것의 유전체 서열을 밝히는 데 성공해 큰 이슈가 되기도 했다.
역사상 영생을 원했던 이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나는 영생은 커녕 장수까지도 바랬던 적이 없다. 도돌이표처럼 돌아갈 수 있는 끝없는 인생이라니 생각만해도 지치고 질리는 건 단지 나의 에너지가 부족한 탓일까. 끝이 없는 무언가는 왠지 가혹하게 느껴진다. 아마 죽기 직전까지 무한의 돈으로 명품 쇼핑을 끝없이 할 수 있다 해도 나중엔 예쁜 걸 고르느라 아낌없이 센스를 발휘하는 대신 '그냥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주세요'하게 될 것만 같다.(...라고 해도 지금 뭔가 벅차오르게 행복한 이 배반적인 느낌이란!)
마침내 끝이 나는 어떤 것들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지닌 가치를 고찰할 수 있게 된다. 덧붙여 '진심을 다해' 생각한다 말하고 싶지만 과학적 측면에서 우리 몸은 뇌를 통해 지시받는 매케닉에 불과하니 이 또한 마음이 아닌 뇌의 일일 것이다. '불멸의 해파리'는 뇌가 없다. 삶의 과정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할 능력이 전혀 없는 해파리는 때문에 아쉬움 한 톨 없이 수많은 마침표를 남발하듯 찍어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결국 그 어떤 동물보다 복잡하고 큰 뇌를 가진 인간만이 '마지막'이 내포하고 있는 가치와 감도에 공명하며 보다 의미있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치앙마이 살이도 어느덧 끝을 향하고 있다. 돌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는 매일매일이 아쉽고 아깝고 애틋하다. 사전에 '애틋하다'를 찾아보면 섭섭하고 안타까워 애가 타는 듯하다고 풀이되어 있고 유의어로는 '슬프다'가 있다. 마지막 날이 정해져 있는 치앙마이는 내게 애틋하고 또한 슬프다. 마음속 깊이 켜켜이 쌓아 놓은 슬픔이 터져 이곳에 왔는데 이곳 때문에 다시 또 슬퍼지니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영생을 바라지 않는다 하였지만 요즘만큼은 '불멸의 해파리'처럼 이곳으로 왔던 맨 처음 날의 폴립 형태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폴립에서 메두사로 넘어가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게 되면 결국 반짝이던 날들은 만성적 일상으로 변질될 것이란 걸.
태어나면서부터 끝을 향해 사는 우리가 보다 잘 살아가는 방법은 막연한 미래의 종말 대신 현재의 계단을 차근차근 잘 밟아 올라가는 것 밖에는 없다.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미세하게 달라지는 공기의 밀도와 햇빛의 농도를 오롯이 온몸으로 느끼면서. 돌아갈 미래를 저어하기 보다 오늘 만나는 따뜻한 이곳을, 아름다운 이곳을, 맛있는 이곳을 더욱 단단히 경험하고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리라. 그러다 우리가 맞닥뜨린 두리안의 계절처럼 충분했고 종국엔 또다시 그리워질 어떤 이야기가 됐을 때 담백하게 이별할 수 있게 되기를.
안녕, 마침내
... 안녕이라고.
Photo: Thien Kim Nguyen Trin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