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중에 가장 지루했지만 재미있었고, 생각이 많이 나는 시절은 초등학교 방학마다 보내졌던 외가댁에서의 시골생활이었다.
방학이 시작되면 초등학교 저 학년 때는 엄마의 손을 붙잡고, 고학년 때는 고향으로 내려가는 이모들 손에 딸려 엄마의 고향인 충청도 예산으로 향했다.
오래된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당시 전화 예약도 안되고, 어른들이 직접 기차역에 방문하여 표를 예매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니면 기차역에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다가 표를 사서 출발했던 기억도 있다.
어쨌거나 서울을 떠나 시골로 간다는 사실만으로 재미있는 일이었다. 시골생활이 재미있었던 것이 아니라 엄마와 함께 떠나는 여행이 즐거워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평소 집에선 잘 웃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외가댁에 가면 평소에 볼 없었던 함박웃음을 짓곤 하셨다. 그래서 외가댁 나들이가 더 좋았던 것으로 기억되는 지도 모르겠다.
시골로 떠나기 며칠 전부터 짐들과 방학숙제가 들어있는 가방을 정리해서 한쪽에 놓아두고, 잠자기 전에 수차례 확인을 계속한다. 혹시라도 빠트린 물건이 없는지도 수없이 확인을 하길 반복한다. 누가 내 짐들을 가져갈 것도 아닌데 밤새 물건을 보고 또 보고를 반복하며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것은 시골 가기 며칠 전부터 치러야 하는 연례행사 같았다.
자는 둥 마는 둥 새벽 6시에 기상하여 부지런히 아침을 먹고, 집 앞 5분인 거리인 33번 좌석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엄마, 나 그리고 두 여동생 이렇게 네 명은 나란히 한 줄로 앉아서 영등포역으로 향했고, 전날 밤을 새워서 버스에서 한숨 깊게 자고 나면 금세 영등포역에 도착해 있어 비몽사몽 신기해하며 눈을 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와는 달리 차멀미를 하던 두 동생들은 버스를 타는 내내 비닐봉지를 들고 있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기에 괴로운 여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이 엄마는 막냇동생 손을, 나는 셋째 동생 손을 꼭 붙잡고 엄마를 따라간다.
영등포역이라는 이정표가 보이면 엄마는 성큼성큼 매표소로 가서 매표원에서 말한다.
"예산행 새마을호로 가장 빨리 출발하는 것으로요. 어른 하나 국민 학생 하나요."
매표원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듯 하니 엄마는 말한다.
"애들은 아직 학교에 안 가요."
나는 생각했다.
'어? 셋째도 국민학생인데....?'
누가 가르쳐 준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입으로 그 이야기를 꺼내면 안 될 것 같았다. 태연한 척 딴 곳을 바라본다.
50살을 곧 바라보는 이 나이에도 기억나는 장항선. 새마을호 열차
긴 시간이 흘러갔는데도 또렷이 기억나는 추억이 참으로 아름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40년 전 일인데 이렇게 생생히 기억이 나다니 그날의 공기와 냄새마저도...
기차여행은 언제나 신이 났다. 기차가 신나게 달이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빌딩과 집들이 보이던 서울에서 벗어나 한없이 펼쳐진 논과 밭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지점을 맞이한다. 그때부터 가족들과 진짜 이별을 하는 경계선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끝없는 논과 밭이 보이는 순간부터 혼자 창밖을 보며 눈물이 흘린 적도 종종 있었다.
'이제 우리 집에서 정말 멀어지고 있구나. 나는 또 다른 세계로 가고 있구나.'
그런 상상을 하면서 논과 밭들을 맞이하였다.
우울한 기분도 잠시 우리는 기차에서 파는 간식카트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 때면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기차에서 파는 간식들은 나와 동생을 더욱 신나게 했다.
내 기억으로 음료수 카트 따로, 간식 카트 따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가 제일 좋아했던 간식은 달걀과 귤, 오징어, 그리고 커피나라는 땅콩에 커피시럽이 묻혀있던 간식이었다.
간식을 먹으며 한없이 펼쳐지는 논과 밭을 보고 있으면 조금 전 울적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발을 동동 구르며 신나게 콧노래까지 부른다.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5분에서 10 정도 정차하는 구역이 있었다.
"이번 역은 천안. 천안역입니다. 우리 열차는 10분간 정차합니다"였다.
엄마와 기차여행에서는 단 한 번도 천악역에 내려서 호두과자를 구입한 적이 없지만, 아빠 혹은 이모와 동행할 때는 반드시 천안역에 내려 가락국수 한 그릇과 천안의 명물인 호두과자 한 봉지를 사가지고 다시 기차로 돌아오는 스릴 만점의 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나는 기차 안에 가만히 있어도 되었지만 아빠를 따라 내렸다. 혹시 우리가 기차를 다시 타기도 전에 떠나 버리면 어쩌지라는 생각을 하며 기차 한번 아빠 한번 번갈아 바라보며 아빠를 따라다녔다.
천안역에서 잠시 내려서 먹던 가락국수, 어묵, 호두과자, 감자 등등...
아빠는 마치 시간을 조정하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가락국수를 먹고 나에게 어묵 하나를 쥐어주면서 엄마를 위한 가락국수 한 그릇을 주문하곤, 얼른 옆에 있는 호두과자집에서 호두과자 두 봉지를 들고 주문해 놓은 가락국수를 챙겨 다시 기차로 오르시는 모습이 어찌나 태연하시던지 멀리서 울리는 안내방송에 내 심장은 터질 듯이 뛰기 시작한다.
"장항선 새마을호가 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조속히 기차에 오르시기 바랍니다."
방송멘트가 들리자마자 조마조마 해지는 내 마음을 이해 못 하는 아빠를 재촉하며 바라보지만, 아빠는 우리를 두고 기차가 떠나지 않을 것을 확신하셨는지 맨 마지막 행렬로 기차에 다시 오르곤 하셨다.
항상 내가 먼저 기차에 오르고 아빠가 오를 때까지 자리에 서서 아빠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혹시 아빠가 기차를 놓쳐버릴까 두려워서 말이다.
그렇게 기차에서 긴긴 시간을 보내고 잠시 쪽잠을 자고 나면 도착해 있던 예산역.
예산역에 도착하여 외가댁으로 바로 가면 얼마나 좋을까?
시골집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또 타야 했다.
예산역에서 버스표를 기차역 앞에 있는 슈퍼에서 팔았다. 나름 예산시장이 근처에 있던 시내였기에 슈퍼는 꽤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고 엄마의 고향에 가족들과 찾아갔던 적이 있었는데 정말 그때 커다랗던 슈퍼는 정말 작은 구멍가게로 변해있었다.
내가 변한 것일까?
가게가 작아진 것일까?
작아도 너무 작았다.
"동산리 어른 하나. 국민학생 하나요."
이곳에서도 내 동생들은 역시 무임승차다.
20분을 시내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 동산리 시골마을 입구.
버스에서 내리면 커다란 호두나무 한그루, 나무 밑에 마련해 놓은 커다란 정자마루
엄마는 그 작은 구멍가게에 들어선다.
[ 동산리슈퍼 ]
예당호를 가로지르는 다리 옆에 자리 잡고 있던 아주 작은 구멍가게 이름
"달순이 왔냐?"
"네 아저씨 잘 지내셨슈?"
"나야 늘 그렇지 뭐. 애들 방학했구먼!"
"야...."
엄마는 우리를 툭치며 "인사해야지.."라고 말한다.
"안녕하세요."
"그려. 어서 오니라. 오니라 고생했다."
우리는 낯설지만 그래도 밝게 웃는다.
슈퍼 아저씨는 엄마에게
"아버지 낚시 하시는 것 같더라. 저그 저수지에서 조금 전에 낚싯밥 사가셨다."
"아 그려유."
엄마는 외가댁에 가져갈 과일과 외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정종을 사들고 가게를 나오신다.
"안녕히 계셔유."
"그려. 또 와."
"야....."
엄마는 할아버지가 낚시를 하고 계신다는 말을 듣고 예당호 쪽으로 걸음을 옮기신다.
예당호 사이를 가로질러 놓인 다리의 이름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예당저수지'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엄마는 다리의 중간에 서서 하염없이 저수지를 바라보시더니 "저기 할아버지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할아버지라고 큰소리로 불러 보라고 시키셨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리는 합창을 하듯 "할아버지! 할아버지!" 크게 외친다.
멀리서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신 할아버지는 "어이~~!!!!"라고 크게 답하시며 밖으로 나가신다고 손짓을 하셨다.
할아버지가 나오 실 때까지 다리에 서서 한없이 할아버지만 바라보시던 엄마
할아버지가 저수지에서 나와 성큼성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데 할아버지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술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버지. 약주 드셨슈?"
"응. 달순이 왔냐?"
고향에만 오면 엄마는 신기하게 사투리를 쓴다. 그 당시 정확히 사투린지 몰랐지만 외가댁에만 오면 바뀌는 엄마의 말투를 나와 동생들이 따라 했었다.
우리를 바라보시던 할아버지의 눈빛이 너무 따뜻했기에 여전히 할아버지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기억이 남아 있다.
"할아버지!!!!"
"왔냐.."
"안녕하세요."
"그려. 그려"
외할아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다시 슈퍼로 향하셨다.
우리에게 주전부리를 사라고 말씀하시면서 슈퍼 아저씨에게 우리를 자랑하고 싶으셨던 것인지,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라며 우리를 부추기셨다.
엄마는 그런 할아버지를 말리시지만 나와 동생은 신이 나서 과자를 몇 개씩 집어 들고 나오면 외할아버지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계산을 하셨다.
낚싯대와 물고기가 들어있는 바구니(몇 마리 들어있지 않다.) 그리고 허리까지 올라오는 긴 장화옷을 입고 계신 할아버지의 모습, 잠시 멈추시더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대 꺼내시곤 그것을 입에 물고는 성큼성큼 걸어가시던 모습이 무척 남자다워 보였다.
할아버지는 평소에 말씀이 없으셨지만 술을 한잔 드셔야지 이런저런 얘기를 하셨기에 우리를 맞이하실 때는 항상 취해 계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으로 환갑잔치 때 모인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잔치를 하며 안방에 앉아서 음식을 드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곱게 차려입은 한복과 백발머리에 미남형 얼굴
외할아버지는 환갑잔치 후 몇 년이 지나 암으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었다.
외할아버지와 자주 만나지 못해서 많은 에피소드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외가댁에 갈 때마다 얼큰하게 취해서 낚시를 핑계 삼아 일부러 마중 나와 계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어릴 적 기억이 생생해지는 것은 그 시절의 철없음이 그리워서인지, 아니면 하루가 365일 마냥 길고 지루했던 시간들이 나날이 그리워서 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