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책 출간 행사로 한국에 다녀왔다. 아이와 함께 한 달 남짓 머문 일정이었다.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행사 이후 아이가 한 달간 한국에서 다니던 어린이집에 다니는 것 말고는.
그 한 달 동안 뉴질랜드 집에 남편만 홀로 남게 되었다. 처음엔 휴가라며 들뜬 목소리였다. 살짝 서운하기도 했지만, 내가 책 작업을 하는 동안 일하면서 아이를 많이 봐주었기에 “이번만큼은 내가 아이를 볼 테니 푹 쉬어.”라고 쿨하게 이야기를 하고 공항에서 헤어졌다.
하지만 일주일쯤 지나자 남편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하고 밖에 나가 즐길 계획을 했는데, 겨울철 매서운 비와 강풍으로 몇 주째 집에만 있게 된 것이다.
며칠 뒤, 뉴질랜드 시간으로 새벽 1시 즈음 다급한 연락이 왔다. 자다가 ‘쿵’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집 밖에 나가보니, 집 아래 창고 공간의 패널이 통째로 뜯겨나갔다고 했다. 강풍이 너무 심해 집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고 했다. 나는 우선 “새벽이니 그냥 자고 내일 아침에 확인해.”라고 말했지만, 예민해진 남편은 밖에 나가 떨어져 나간 패널을 치우고 혹시라도 더 무너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고 한다.
다음 날 보내온 사진을 보고서야 남편이 잠을 이루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창고로 사용하는 집 아래 부분의 벽체 패널이 반쯤 뜯겨 나갔고, 그 틈으로 강풍이 집 안으로 들어와 바닥에서 계속 찬바람이 들어왔다. 부엌 장판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사진 속 집은 우리 집 같지 않았다. 남편은 “너희가 한국에 가있어 다행이야.”라고 이야기했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도 걱정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며칠 후에는 강풍과 비바람으로 펜스까지 넘어갔다. 남편이 보내온 사진을 보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하.. 심각하네.”
급히 보험사에 연락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래도 집 자체가 부서진 건 아니잖아. 다른 집들은 집에서 잠을 못 잘 정도로 피해가 커서 그 집들부터 처리해야 하니 오래 기다려야 할 거야.”였다. 빌더에게도 연락했지만, 강풍 피해가 속출해 모두 밀려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소식을 들은 나는 정작 그 심각성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내가 그 자리에 있지 않으니, 내 집인데도 마치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어떻게든 되겠지. 돌아가면 해결되겠지.’ 하고 담담하게 생각했다.
한국 가족들에게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도 가족들의 반응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집이 무너졌다고?? 어떡해…” 하던 가족들도 막상 사진을 보여주니, “재난민 같네. 구호물품이라도 보내야겠어.” 하고 웃어넘겼다.
한국의 아파트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집이 무너진다는 게 실감 나지 않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뉴스에서 홍수피해나 산사태 재해처럼 멀게만 비친 것이다.
“비애(悲哀)에 대한 우리의 동감은 어떤 의미에서는 환희(歡喜)에 대한 동감보다도 보편적이다. 비록 비애의 정도가 지나치더라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 동류의식을 가질 수 있다. 이 경우 우리가 느끼는 것은 사실 시인을 구성하는 완전한 동감, 감정의 완전한 조화와 일치에는 이르지 못한다. 우리는 고통을 받는 자와 함께 울고 부르짖고 슬퍼하지 않는다.(중략) 비애에 대한 우리의 동감은 환희에 대한 우리들의 동감보다 흔히 훨씬 자극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감은 항상 당사자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의 격렬함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주1)"
어려움과 재난 속에서 자제(自制)의 덕목을 이야기하는 애덤 스미스의 글귀가 떠올랐다. 뉴스에서 재난민들을 보아도 ‘어떡해.. 딱하지..’라는 것 이외에 우리는 내가 그 상황에 처하지 않은 이상 더 이상의 공감을 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내가 직접 그 자리에 있지 않은 이상 고통을 온전히 공유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안쓰럽다, 딱하다’ 정도로 멈춘다. 그 이상의 동감은 불가능하다.
고난 속에서도 너그러움과 여유를 가지는 것, 그것은 내가 고난 속이 아니라 그곳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와있어야 가능했다. 멀찍이 떨어져 있었기에 나는 오히려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삶의 고난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내 삶조차도 한 발짝 물러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배웠다. 기쁠 때든 슬플 때든, 내 감정에 너무 함몰되지 않고 제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나를 지켜주는 힘일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애덤스미스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극히 정규적인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은 어떤 사소한 일들이 그에게 가할 수 있는 고통들을 숨겨버린다. (중략) 그는 자신에게 닥친 사소한 재난들을, 그것을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자신도 이미 알고 있으므로,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대수롭지 않은 일로 돌려버리고 만다.(주2)”
삶의 사건들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무너짐이 되기도 하고, 단순한 흔들림이 되기도 한다.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는 시선, 그것이 불안을 견디는 가장 큰 지혜일 것이다.
주 1,2> 도덕감정론, 애덤 스미스, 비봉출판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