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classless society야."

어느 키위 노부부와의 대화

by 해보름

12월과 1월은 뉴질랜드의 네 번의 방학 중 가장 긴 마지막 텀 브레이크다.

한 해의 학기가 모두 끝나는 시기이자, 뉴질랜드가 가장 눈부신 여름을 맞이하는 시간 이다.


아이 방학이 시작된 지 2주 차.

며칠 연거푸 비가 내려 여름답지 않게 스산했지만, 오늘 아침 갑자기 얼굴을 내민 해가 그저 반가웠다.


해만 뜨면 나가야 하는 나라가 뉴질랜드다.

자연과 함께하는 이곳에서는 햇살 하나로 모든 것이 눈부셔지고, 즐길 것도 할 것도 많아진다.


오늘 향한 곳은 오클랜드에서 가장 이국적인 풍경을 가진 '미션베이'였다.

바다와 푸른 공원, 그리고 맛있는 카페들이 한데 어우러진 곳.

바다를 끼고 달리는 드라이브웨이부터 외국에 와 있다는 느낌이 물씬 난다.

미션베이 바닷가

바닷바람을 맞으며 조깅을 하는 사람들, 사이클을 타는 사람들 모두가 아름답게 보인다.

한참을 바다를 따라 들어가면 공원과 바다가 맞닿고, 그 너머로 오클랜드 시티뷰가 펼쳐진다.

도시와 자연이 함께 존재하는, 말 그대로 핫스팟이다.

여름철이면 전 세계에서 모인 관광객들로 붐비며 관광지 특유의 활기가 더해진다.

미션베이 까페거리

오늘은 늘 가던 레스토랑 대신 바닷바람을 느낄 수 있는 1층 카페를 찾았다.

바람을 피해 실내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잠시 후, 바로 옆 테이블에 나이 지긋한 키위 노부부가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앉자마자 우리 아이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선하면서도 고상한 분위기. 나도 모르게 자꾸 시선이 갔다.


식사가 거의 끝날 즈음,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갔다.

낮부터 식사에 와인 한 잔을 곁들이는 모습에서 이곳이 익숙한 사람들임을 느꼈는데, 예상대로 그들은 이 지역 주민이었다.

이 일대는 바다 전망의 2~3층 주택들이 늘어서 있고, 집값도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은 곳이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느껴진 것은 겉치레가 아닌, 나이 듦과 함께 쌓인 여유와 웃음, 그리고 자연스러운 품위였다.


대화는 사는 곳과 이곳을 자주 찾는지, 어떤 일을 해왔는지로 이어지다

그들이 몇 년 전 만났다는 한 한국 교수 이야기로 옮겨갔다.

할머니는 이 지역 대학에서 일하셨는데, 한국에서 온 교환교수를 6개월간 도와주게 되었단다.

그 교수는 그들의 눈에 굉장히 높은 신분의 사람처럼 보였다고 했다.

곁에 있던 다른 한국인들이 마치 귀족을 대하듯 그를 대접하는 분위기였다고.


그래서 그들은 우리에게 물었다.

“한국에도 귀족 사회가 있나요?”


우리는 한국에 법적인 귀족 제도는 없지만,

정치인이나 부유한 사업가, 돈이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특별한 대우를 기대하거나 제공하는 문화가 남아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나 역시 이곳에 살면서
내가 익숙해져 왔던 문화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적어도 내가 살아오며 경험해 온 세계와 달리,
이곳에서는 ‘나 누군데’라는 말이
큰 힘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지위나 재산, 직업보다
사람 그 자체로 마주하는 나라.
아이와 노인, 힘 있는 사람과 힘없는 사람이
동등하게 존중받는 사회였다.


나는 전에 이곳에서 일하며 느꼈던 한 장면도 들려주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교장선생님을 거리낌 없이 이름으로 부르고,

자신이 만든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교장실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아이와 어른 사이에 불필요한 벽이 없는 그 풍경이

처음엔 낯설고, 동시에 참으로 부럽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내 이야기를 듣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 조용히 말했다.

“여기는 classless society야.”


부로 나뉘는 계급도,
직업으로 매겨지는 서열도,
나이로 만들어지는 위계도 없는 곳.


아이와 어른이 함께 살아가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같은 자리에 앉으며,
원주민과 이민자가 나란히 하루를 보내는 사회.


그곳이, 내가 다시 살고 있는 뉴질랜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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