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정열이 있는 성하의 계절. 예전에, 아주 오래전엔 누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 뭐냐고 물으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여름이라고 대답하곤 했었다. 오죽하면 아들의 아명을 여름이라고 짓고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줄기차게 불러댔을까. 봄이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꽃망울의 축포를 쏘아대는-계절이라면, 여름은 성장의 절정이며- 이글이글 태양빛이 작렬하는-열정의 계절임에는 틀림없다. 지금이야 뜨뜻미지근한 성격에 우유부단함의 대명사이지만 그래도 2,30대 젊은 시절엔 열정적이었고 호불호도 분명하여 똑 부러진다는 소리도 꽤 듣던 나였다.
봄은 내가 젊어 꽃이 지금만큼 이쁜 줄 몰랐고 가을은 낙엽 밟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좋아도 왠지 스산하고 청승맞아서 별로 였고 겨울은 추위를 많이 타고 눈길에 잘 넘어지는 나에게는 최악의 계절이었으니 당연 돋보이는 것이 계절 중의 계절 여름이었다.그러나 사람도, 생각도 여러 번 변한다 했던가. 갱년기를 겪는 아줌마에게 여름은 그저 단지 견디기 힘든 계절.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더위의 시작을 알리는 사인은 내가 뜨거운 아메리카노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주문을 하는 시기이다. 명희 씨 카페에서 아이스로 주문을 한 것이 한 달쯤 넘었으니 6월 중순쯤 본격적인 더위가 찾아온 것이 정확하다. 집에서 카페까지 10분 거리니 여름철 그쯤 빠른 걸음으로 걷다 보면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하는데, 그때 주문한 아이스커피 한 모금이 그렇게 청량하고 달 수가 없다. 오늘은 오전부터 바람 한점 없고 뜨거운 열기가 지면으로부터 올라오는 게 흡사 습식 사우나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연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카페 안으로 들어선다.
명희 씨 성품이 눈치 줄 사람도 아니고 나 역시 매장이 바빠지면 자리를 내어줄 눈치 정도는있으니 '꿈꾸다'는 나의 단골 아지트이다. 더욱이 명희 씨와 내가 동갑내기 친구니 작업실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다. 시원하고 쾌적하고 너른 창밖으로 정원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나의 지금의 유일한 피서 방법이다. 카페 이름처럼 나는 작가가 되는 꿈을 꾸기도, 파도가 넘실대는 인적 없는 해변가에 서서 바다를 보는 꿈을 꾸기도 한다. 나의 상상은 먼 이국땅의 낯선 풍경 속에 머문다.
명희 씨가 김밥과 떡볶이를 접시에 나눠준다. 명희 씨 지인이 점심으로 사 온 것을 내게 나눠준다. 어느새 시간이 한시를 넘었다. 다시 아메리카노를 연하게 한 잔 주문하고 읽다만 책을 펼쳐 읽는다.
냉장고 문을 열고 자두와 수박을 꺼내 먹기 좋게 쓱쓱 잘라 접시에 담아 선풍기 앞에 앉았다. 푹푹 찌는 더위에 툴툴거리다 탐스럽고 싱그런 제철과일을 코 앞에 마주하니 슬그머니 불평하는 마음이사라진다. 과일을 좋아하는 내가 특히 여름철 과일 복숭아, 자두, 블루베리를 좋아하는데, 이것이 여름에만 맛보는 별미니-덥다. 덥다 노래를 부르며 사계절에서 여름만 쏙 빠지기 바랐던 심보가 새삼 민망해진다.
"그래 더위야 올 테면 와라. 시간은 낼모레면 중복이고 8월 중순 말복까지만 버티면 지 아무리 다 삼켜버릴 듯 맹위를 떨치는 더위라도 기세가 꺾이겠지.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하고 중얼거리며 금방 냉장고에서 꺼낸 수박을 한입 베어 문다.
갑자기 수박을 좋아하는 아들 생각이 난다. 아들은 한여름에 태어났다. 내가 임신 중에 과일을 원 없이 먹은 덕인지 아들은 나를 닮아 과일을 좋아하는데, 특히 수박을 좋아한다. 이 더위에 현장에서 근무할 아들을 생각하니 목이 멘다. 직장을 다니던 아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타일공이 된 것은 6개월 전 이야기이다. 한참 초보에 힘든 일은 도맡아서 할 텐데... 더위에 탈진되지는 않을지... 가슴이 저려오며 손에 쥔 수박조각을 내려놓는다.
어느 정신과 의사의 인터뷰에서 "인생에서 가장 큰 저주는 젊은 나이에 성공하는 것이다.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의 깊은 뜻을 알기에 나도 동감하고 아들에게 위로 삼아 이야기해줬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힘이 못 되는 내가 너무 밉다.제대 후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던 아들이 늘 고단하고 어두운 얼굴로 살아가는 것이 이 순간 못 견디게 서늘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부모가 고작 할 수 있는 말. "너를 믿는다. 다 잘될 거야. 사랑한다. " 는 말뿐. 힘든 시기를 묵묵히 헤쳐나가는 아들에게 이 말들이 과연 힘이 될 수 있을까?...
"아들, 피곤하지? 저녁은? 엄마가 미안해."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엄마, 무슨 일 있어요?" 하고 놀란 아들에게 "그냥 미안하네. 힘든데 연락 자주 하란 것도... 얼굴 보고 싶다고 보채는 것도 다 모두..." 아들이 껄껄 웃으며 "아니에요. "하며 오늘 현장에서 눈썰미가 있다고 윗사람에게 칭찬받은 이야기와 마루 자랑을 늘어놓는다. 가끔 쉬는 날 아들이 들르는 애견 카페의 사장님이 마루가 사회성이 좋고 순한 강아지라고 칭찬한 것이 듣기 좋았던지 내게 열심히 자랑을 한다.
"8월까지만 참아~ 9월 되면 좀 나을 거야. 많이 덥지? 물 많이 마시고 입맛 없어도 잘 먹고 당분간 쉬는 날에 집에 오지 말고... " 하는 나의 말에 씩씩하게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라며 웃는다.
나이 든다고 다 철이 드는 것이 아닌가 보다. 덥다. 더워를 입에 달고 살던 내가 이제는 차마 덥다는 소리가 안 나온다. 정작 무더위에 고생하는 아들 덕에-땀 흘리는 농부들과 코로나 현장의 의료진, 쪽방촌 소외된 이웃들. 그 밖에 여러 현장에서 구슬 같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는 많은 노동자들이 이제 비로소 내 눈에 보인다.
인생을 잘 살려면 내가 못 가진 것보다는 내가 가진 것들에 집중하고 감사하며 살 때 그 삶은 저주가 아닌 진짜 축복임을 깨닫는다.
시계가 정오를 가리킨다. 오늘도 며칠 째 폭염경보를 알리는 메시지가 울린다. 생각이 바뀌니 펄펄 끓는-대지를 삼킬듯한- 더위도 감사하게 견뎌진다. 이 시간 오전의 고단한 노동을 견디고 점심을 먹을 아들 얼굴이 떠오른다. 시원한 콩국수에 간식으로 수박을 곁들여 아들에게 한상 차려 주고 싶다. 그리고 아들의 굳은살 박인 손을 어루만지고 싶다.
지금 이 순간 흐르는 바람이 되고 싶다. 멀리 아들 곁으로 날아가 그의 이마의흐르는 땀을 닦고, 그의 젖은 어깨를 두드리는 서늘한 바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