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가 제철이다. 보랏빛 싱싱한 가지가 시장에 지천으로 나와있다. 이맘때 가지를 보면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고교 동창이면서 절친 3인방 중 하나였던 민주. 대학시절 그녀의 집에 놀러 가면 솜씨 좋은 그녀가 밥상을 차려 주었다. 그 무렵 민주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된 시기였다. 가지 요리로는 엄마의 가지나물만 먹어 본 내게 그녀가 부엌에서 짧은 시간 뚝딱뚝딱 만들어 온 소고기를 곁들어 간장에 볶은 가지볶음 맛은 쫄깃한 식감과 감칠맛 나는 것이 밥 한 공기를 금세 후딱 비우게 만들었다.
엄마가 가지를 쪄서 길게 찢어 양념장에 무쳐 상 위에 내어 놓은 소박한 시골식 가지나물에길들여져 있다 그녀의 화려한 색감과 다채로운 재료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가지 볶음을 처음 맛보았을 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흘러 강산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항상 이맘때 가지 철이면 그녀의 맛깔난 가지볶음이 향수처럼 떠오른다.
오전에 재래시장에서 가지를 한 바구니 사와 이웃 할머니에게 나눠드리고 남은 반으로 기억 속의 가지볶음을 재현해 볼 요량으로 우선 가지를 깨끗이 씻어 좀 도톰하게 어슷 썰었다. 달군 프라이팬에 기름을 좀 넉넉히 두르고 불고기 양념한 소고기와 당근, 양파를 반쯤 익을 만큼 볶다 어슷 썬 가지를 넣고 간장, 설탕, 파, 마늘을 넣고 볶다가 거의 완성되었을 때 참기름, 후추, 깨소금을 뿌려 주면 근사한 가지볶음이 완성된다. 추억을 그리며 완성한 가지볶음엔 정성도 듬뿍, 양념도 듬뿍 들었는데... 그래도 그때 그 맛은 아니다. 나는 지금 그녀의 손맛이 그립다. 아니, 그녀가 몹시 그립다.
민주는 피부가 눈에 띄게 뽀얗고 가늘고 긴 눈이 동양적인 미인형의 얼굴인데 반해 성격은 짓궂고 장난기 많은 친구였다. 고교 동창으로 집도 멀지 않은 동네에 위치하고 있어. 자주 왕래하다 보니 어느새 절친이 된 케이스이다. 내성적으로 낯을 가리는 나와 달리 그녀는 활달했고 성격도 좋아 여러 친구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 그녀와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짝꿍이 되어 등하교를 같이 하다 보니 어느새 단짝이 되었다.
그녀는 늦둥이 막내딸로 특히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내가 고등학교 다니던 80년대 중반에는 서울이긴 해도 공연이나 음악회를 감상할 기회나 여건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민주는 아버지의 사랑과 배려 덕에 문화적 호사를 누리던 친구였다. 그녀가 클래식 음악회와 발레 공연 '백조의 호수' , '호두 까기 인형'을 관람했다고 눈을 반짝이며 말할 때는 나와는 딴 세상 이야기 같았지만 그렇다고 크게 부럽지는 않았다. 단지 무뚝뚝한 나의 아버지에 비해 그녀에게 무한 사랑을 쏟는 그녀의 아버지와 그녀의 관계가 조금 부러웠을 뿐이다.
둘 다 공부는 열심히 안 하는 벼락치기 스타일이었지만 서로 짝사랑하는 선생님들 과목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는 어찌 보면 순정파 소녀들이었다. 어찌하다 보니 난 운 좋게 원하는 대학은 아니었지만 원하는 학과에 한 번에 붙는 행운이 주어졌지만 민주는 원하는 학교에떨어져 재수를 하게 되었고 우리 둘은 잠시 떨어져 지내야 했다. 그때는 왠지 나만 합격한 것이 미안하고 단짝 친구와 헤어지는 것이 합격한 사실보다 마음이 쓰렸다.
나는 586 기성세대다. 민주화 운동이 치열하고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역한 캠퍼스에서 실질적인 학과 공부나 미래에 대한 계획보다는 나라의 미래나 청춘, 그 존재의 버거움에 대한 고민으로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범생이였던 나도 대리출석을 친구들한테 종종 부탁하고는 수업 대신 땡땡이를 치고 지금처럼 혼자 카페에 앉아 버지니아 울프의 책에 심취하기도, 멍하니 살아있는 의미의 가치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도 했으며 민주네 학교에 찾아가 대낮부터 낮술을 마시며 개똥철학을 읊조리기도 했다.
그녀는 순수하고 뜨거운 여자였다. 사랑하는 남자 친구가 학교 총학생회의 간부로 골수 운동권 학생이었다. 나중에 민주와 같이 옥천에 수감된 민주의 남자 친구를 면회 갔을 때도 지금처럼 햇볕이 작렬하는 여름이었다.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장난꾸러기 그녀는 말이 없었고 나도 애써 말을 걸지 않았다.
그녀의 사랑은 헌신적이었다. 1년의 옥바라지를 치르고도 언제나 씩씩하고 무한의 사랑으로 그녀를 존중하지 않는 남자 친구를 묵묵히 곁에서 지켜주던 참으로 무던한 그녀였다. 걱정 반, 농담 반 나는 "그렇게 너를 존중할 줄 모르는 남자에게 헌신하다가 헌신짝 될 수 있어. " 하고 이야기하면 그녀는 짐짓 모른 척 다른 이야기로 상황을 전환했다.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은 건 내가 4학년 졸업논문을 쓰던 때로 기억한다. 내가 한참 첫사랑과 연애의 달콤함에 빠져 있을 때, 세상이 온통 핑크빛으로 보이던 시절. 다급하게 민주의 행방을 묻는 민주의 아버지에게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각자 생활이 바빠 그녀와 내가 뜸하게 연락하던 시점이었다. 그녀가 집을 나갔다는 사실은 나도 충격적이었다. 여러 친구들에게 수소문을 해도 찾을 길이 없었다.
반년쯤 지나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담담하게 결혼했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말문이 막혔다. 상대는 내가 아는 영민하고 지극히 냉철하고 이기적이었던 그녀의 남자 친구가 아니라 그녀만 아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평범한 남자가 지금의 남편이라고 수줍게 웃는다.
난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럴만한 이유가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다. 민주는 졸업을 얼마 안 남기고 자퇴를 했고 그녀를 각별히 아끼셨던 아버지와는 척을 졌다.
졸업 후 나는 결혼을 해서 남편의 학업으로 외국에 나가게 되었고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사는 게 녹록지 않다. 그녀도 나도 사는 것이 버거워 아니면 우리가 공유했던 시절이 서로를 보는 것만으로도 진한 그리움으로 올라올까 봐 과거를 떠올릴만한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연락이 점점 뜸해졌다. 지금 떠오르는 모습은 기미가 잔뜩 낀 퉁퉁부은 얼굴과 억척스레 식당일을 하던 모습. 찾아간 식당에서 맛있는 쫄깃한 수제비를 끓여주고 밑반찬을 싸주던 그녀...
그녀와 나의 3,40대는 치열했고 고단했다.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았고 우린 혹독한 삶에 지쳐갔고 자연스레 소식이 멀어졌다.
식은 밥에 갓 볶은 가지볶음이 목에 턱턱 막힌다. 그리운 것들은 항상 내 곁을 떠났다. 그 빈자리는 분주한 현실의 삶으로 늘 비워지기 무섭게 채워졌다. 한참을 잊고 있었는데, 이 보랏빛 싱그러운 가치 철에 그녀의 동그랗고 하얀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움이 턱밑까지 차오르는데 그녀도 나를 그리워할까? 오늘따라 유난히 그녀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