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사는 내게 한밤중 누군가 찾아와 벨을 누르거나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젯밤 평소처럼 씻고 잘 준비를 하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누구지 이 밤에... 혹시 옆집 할머니한테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걸까?' 현관 앞으로 나서며 조심스레 그러면서도 경계하는 음성으로 "누구세요?" 하니 "저예요." 하는 아들 목소리가 들린다. 어, 낮에 통화할 때만 해도 아무 언질도 없었고 요즘 바빠 다음 달이나 되어야 집에 올 수 있다고 했었는데... 예기치 못한 아들의 방문이 너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올라온 채 맨발로 뛰어가 문을 열었다.
"아들, 어떻게 연락도 없이 왔어? 깜짝이야." 아들의 어깨에 맨 가방 위로 동그란 마루의 머리가 올라와서 헥헥거린다. "응 엄마 놀라게 해 주려고. 엄마 기쁘죠? "하고 껄껄 웃는다. 우리 아들이 전혀 이런 스타일이 아닌데, 속정은 깊어도 이벤트나 서프라이즈 선물과는 거리가 먼 뚝뚝한 아들인데... 어쨌든 나를 생각해 불쑥 찾아와 준 아들이 너무 예쁘고 고마워어깨를 토닥이며 내 품에 안기엔 너무 커버린 아들을 꽉 끌어안는다.
가방 속에 들어 있던 마루를 번쩍 들어 올려 뽀뽀 세례를 퍼붓는다. 지난번보다 많이 묵직해졌다. 이달 23일이 마루가 태어난 일 년이 되는 날이니 이제 어엿한 성견이 된 것이다. 3개월 아기 때 왔으니 우리 식구가 된 지 9개월 밖에는 안되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마루 없으면 -아들도 나도- 안 되는 끈끈한 정과 사랑으로 묶인 가족임에는 아들도 나도 부인할 수 없다.
오랜만에 온 아들에게 뭐라도 먹이고 싶은데 예고 없이 온 탓에 줄만한 것이 없으니 급히 방울토마토와 키위를 접시에 담아 아들에게 갖다 주니 출출했는지 뚝딱 접시를 비운다. 남자 혼자 자취하니 과일을 제대로 먹을 일이 없을 것이다.
"너 엄마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연락도 없이 왔어?" "엄마가 이 밤에 갈 때가 어딨어요. " 하며 낄낄 거리며 놀린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만 아들의 등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자식, 엄마 오라는데 많아." 하고 허세를 부리며 웃는다.
이상하다. 마루가 나를 보면 폴짝폴짝 뛰고 내 주위를 멤 멤 맴도는데 오늘따라 기운이 없어 보인다. 제 아빠 곁에 자리를 잡고 길게 눕는다. "마루 어디 아프니? 오늘 너무 점잖은데... " 하고 근심 섞인 목소리로 아들에게 물으니 마루가 호흡이 가빠해서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심장 판막 쪽에 문제가 있어 평생 약으로 관리를 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한다.
가만 누워있는 마루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들의 얼굴과 마루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아들이 볼까 나오는 눈물을 몰래 삼킨다.
혼자 외동으로 자라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들은 친구들을 좋아하고 잘 어울린다. 속정도 깊고 의리 있는 씩씩한 사나이는-마루한테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하고 좋은 아빠이다. 사람에게도, 말 못 하는 동물에게도 기본적인 측은지심과 사랑이 있는 아이니 한동안 많이 속상했노라고 내게 고백하며 마루의 호흡이 거칠면 안타까운 눈으로 지그시 바라본다.
밤이 깊어가는데 오랜만에 보는 아들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에 겨워 아들의 얼굴을 보고 또 보고 "일하는 것 많이 힘들지?" 하며 살며시 손을 잡는다. 아들은 아니라고 괜찮다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두런두런 이야기 꽃을 피운다. 시간이 활과 같이 빠르게 지나간다. 선물 같은 아들, 선물 같은 밤-고단한 하루에 받은 최고의 선물이다. 어느새 아들도 마루도 곤히 잠이 들었다. 그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건강하라고, 행복하라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한다.
잠결에 몸을 뒤척이다 구부린 다리를 펴는데 뭔가 물컹한 물체가 발에 걸린다. 마루가 내 발밑에서 밤새 잠이 들었다가 나의 움직임에 화들짝 놀라 깨서는 지 아빠한테 쪼르르 달려가 그 옆에 다시 눕는다. 반쯤 감긴 눈으로 시계를 보니 아침 7시이다. 평소 눈 뜨는 시간이지만 어젯밤 늦게 잠이 든 탓에 비몽사몽 잠에 취해 한참을 누워 있었다. 마루와 아들도 한밤중이다.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하려다 곤히 자고 있는 아들과 마루를 깨울 것 같아 숨죽이며 아침을 맞이한다. 오전부터 습한 기운이 올라온다. 오늘도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지겠다...
한참을 잔 것 같아 눈을 떠보니 9시 10분 전이다. 평소 기상시간을 한참 지나서 그런지 배에서 천둥소리가 난다. 살금살금 거실로 나와 자고 있는 애들을 보니 아직도 한밤중이다. 차리려던 아침상을 포기하고 조용히 방으로 돌아와 방문을 닫는다. 아무래도 지금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침밥보다는 잠이 보약인 것 같다. 책상 앞에 앉아 잠시 이른 점심 메뉴를 고민하다 어제 쓰다만 글의 마무리를 써 내려간다. 글이 매끄럽지 않고 군데군데 산만하다.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하늘이 어둑해지더니 오전부터 소나기가 세차게 쏟아진다.
메뉴 고민의 구원자는 아들이다. 나의 메뉴 고민을 시원하게 날려줄 한마디. "엄마, 비빔국수 해주세요~" 그 한마디에 부리나케 달걀을 삶고 오이를 채를 썰고 신김치를 송송 썰어 놓고 국수 끓일 물을 불위에 올려놓는다. 잠이 깬 아들은 열심히 휴대폰 게임 삼매경이고 마루는 이것저것 호기심 나는 물건을 물어뜯고는 계속 새로운 놀이거리를 찾아 헤맨다. 가끔 아들이 마루의 몸을 쓰다듬고 다정한 눈으로 쳐다본다.
쓱쓱 국수를 양념장에 비벼 미리 준비한 고명을 얹어 아들과 상 앞에 마주 앉았다. 더위를 타는지 얼굴이 핼쑥해졌다. 부모 눈에 자식은 늘 바라만 보아도 행복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나 가슴을 짠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그 눈빛을 아들이 마루를 바라볼 때도 나는 느낄 수 있다. 아들도 이제는 부모의 마음을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몇 차례 소나기가 그치다 내리 다를 반복하는 오후, 아들이 짐을 꾸린다. 낼 출근 전 오늘 마루의 심장 정밀검사를 위해 지인의 근무하는 동물병원으로 출발하는 아들과 마루에게 -사랑한다 말하며 꼭 안아주었다. 마루의 까만 눈동자가 슬픈 듯 반짝인다. 아들이 나의 어깨를 다시 감싸며 건강하라고 아프지 말라고 토닥인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마루가 어지르고 간 자리를 청소하고, 덮었던 이불을 세탁하고, 설거지를 하니 시간이 후딱 가버렸다. 다시 혼자만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서운함과 홀가분한 마음이 엇비슷하게 섞여 아프지도 외롭지도 허전하지도 않으니 참 다행이다 싶다. 물만밥에 찬물에 띄운 오이지를 찬으로 저녁을 먹는데 아들한테서 전화가 왔다.
"엄마, 마루 결과가 생각보다 양호해요. 약간 의심스러운 이상 증상은 있지만 좀 지켜보재요. 3개월 후에 다시 검사해요... " 하며 아들이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한참을 마루의 경과에 대해 자세히 보고를 한다. 그 밝은 목소리에 가슴 한편에 먹구름 같던 근심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희망의 싹이 자란다.
고즈넉한 밤 -오전에 쓰다만 글을 드디어 마무리했다. 서툴고 미흡해도 지나는 과정임을 애써 부인하고 싶지 않다. 언젠가는 무르익어 갈 것이라 믿고 싶다.
짧고도 긴 하루가 지나간다. 아들의 어젯밤 나를 위한 서프라이즈는 성공을 했다. 나를 향한 배려가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고 나를 잠시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한 일상으로 인도해주었다. 상대를 배려하고 기쁨을 주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랑하는 관계에서의 기본일 것이다. 내가 아들과 마루를 위해 편한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사랑이듯 아들도 나와 마루를 위해 마음을 헤아려 주고 건강을 챙겨 주는 것이 사랑일 것이다.
이제는 짧은 한여름밤의 꿈은 사라지고 우리 세 식구는 각자의 세상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응원하는 가족이 있음을 믿고-다시 치열하게 살아갈 것이다. 오직 사랑의 힘으로 험한 세상을 헤쳐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