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변신은 무죄.

샤라라 원피스 입고 마실 갑니다.

by 예쁜손

젖은 머리를 급하게 말리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명희 씨 카페로 향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커피이다. 씻고 아침을 간단히 먹고 집을 나서면 거의 정확히 오전 10시 무렵이다. 자고 일어나면 가벼운 두통이 있는데, 이것도 일종의 카페인 중독 같다. 카페에 도착해 커피를 한잔 마시면 머리가 금세 개운해진다. 갱년기 전에는 하루에 서, 너 잔은 마셨는데 이제는 하루 많으면 두 잔에서 아쉬운 마무리를 한다.

왠지 오늘은 걸음걸이가 날아갈 듯 가볍다. 평소에 바지를 즐겨 입던 나도 요즘은 마음에 뭔 꽃바람이 불었는지 하늘하늘한 시폰 원피스나 블라우스에 스커트 차림을 주로 입고 외출을 하는데, 이상하게 옷차림을 달리 하니 걸음걸이도 한결 가볍고 조신해지는 게 참 신기하다. 하늘색 원피스가 살랑 부는 바람에 나풀거릴 때마다 구름 위를 걷듯 사뿐사뿐 가벼우니-오늘 하루 기분 좋은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집에서 십 분쯤 걸어가다 보면 하얗고 아담한 '꿈꾸다'가 반갑게 보인다. 오늘도 내가 가게에 1등으로 도착했다. 어쩌다 가끔 1등을 놓칠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명희 씨보다 카페에 일찍 도착해서 명희 씨 오기를 목을 빼고 기다릴 때도 있다. 재미없는 나의 삶은 -강박증은 없지만- 요즘 꽤나 규칙적으로 예측 가능할 수 있게 돌아간다.

예전엔 일어나고 싶을 때, 자고 싶을 때, 먹고 싶을 때 마음이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였는데 그 결과는 무력감이 커짐과 동시에 육체적으로도 더 피곤한 것이 매사 의욕이 떨어졌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의 삶처럼 시계추같이 정확한 삶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하루를 꼼꼼하게 재단하려 하는 이유는 쓸데없는 감정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때로는 넘치는 것이 모자란 것보다 부족할 때도 있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니 언제 보아도 반가운 명희 씨가 나를 보고 웃는다. 오전부터 후끈한 열기를 식혀 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모금이 지금은 최고로 행복하다. 더 이상 바랄 것도 아쉬운 것도 없으니 이 순간은 내 팔자도 상팔자 아닌가.



오전 시간을 주로 할애하여 글을 쓰곤 하는데, 오늘 영 집중이 안된다. 쓰다 지우다 쓰다 지우 다를 반복하고는 한숨만 길게 쉰다. 내 마음과 생각을 잘 풀어가려 하면 할수록 글은 복잡하게 꼬이고 산으로 간다. 끙끙거리다 미련 없이 삭제 버튼을 누른다. 오늘은 아무래도 일치감치 접고- 자매 아니랄까 봐 같은 집순이인- 동생한테 가야겠다. 십중팔구 집에 있을 동생한테 전화를 걸어보니 예상대로 집이다. 같이 점심을 먹자고 나오라 하니 밖에서 먹기가 코로나 때문에 찝찝하다고 집으로 오라고 한다. 비대면 수업으로 집안에 있을 조카들의 간식으로 팥빙수를 사서 포장해 들고는 동생네로 향한다.

현관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작은 녀석이 "이모 안녕하세요? "하며 폴더 인사를 하고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헤헤 웃으며 "이모 예뻐요!"하고 내 주위를 삥 돈다. 매일 동생네 식사 준비로 가는 날은 젤 편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인데, 하늘하늘하고 화사한 원피스를 입은 이모가 낯설면서도 예뻐 보였나 보다. 동생도 한마디 거든다. "잘 어울리네.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하며 씩 웃는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 했던가. 어깨를 으쓱한다.

뒤늦게 큰 조카가 제 방에서 나와 나를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다 역시 무뚝뚝한 성격답게 "이모, 안녕! " 하고 짧게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간다. 동생이랑 눈이 마주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조카들이 성격이 남녀가 바뀌었다. 곰살맞은 막내 사내 조카와 할 말만 딱 하는 여자 조카의 나의 옷차림에 대한 극명한 반응이 어찌나 우스운지 한참을 동생과 나는 낄낄거렸다.



동생은 고기를 굽고 나는 상추를 씻고 잘 익은 포기김치를 접시에 보기 좋게 담아 아이들과 함께 둘러앉아 점심 식사를 한다. 역시 밥은 여럿이 먹어야 제맛이 난다.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도 어우렁더우렁 분위기에 맞춰 여러 쌈을 입이 터질 듯 먹었더니 적당한 포만감이 기분 좋다. 동생은 설거지를 하고 나는 과일을 준비해서 미리 가지고 온 팥빙수와 디저트로 아이들과 함께 나눠 먹는다. 한 여름에 먹는 별미 팥빙수가 머리를 띵하게 할 정도로 시원하면서도 달콤하다. 입안이 얼얼하다. 더위가 저만치 물러난다.


간간히 부는 바람에 치맛자락이 살랑거린다. 옷차림이 자세와 행동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평소 씩씩한, 성큼성큼 걷던 내가 맵시 있게 우아하게 길을 걷는다. 붉은 해가 서편으로 길게 드리우고 고운 석양이 가슴을 뛰게 한다.



헐렁한 반바지에 오래 입어 -목이 늘어났지만- 젤 편한 티셔츠로 갈아입은 나는 다시 씩씩하고 털털한 생활인으로 돌아와 거울을 본다. 익숙한 모습의 내가 거울 속에서 웃고 있다. 그러나 서글프지는 않다. 이 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오면 늘 그러듯 고운 옷을 차려 입고 화려한 외출을 할 것이다. 꿈을 꿀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듯 비록 삶은 궁상맞고 남루하지만 품격 있는 차림이 언젠가는 그에 맞는 곳으로 나를 인도하리라 믿는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나를 깨운다. 부지런히 씻고 아침을 먹고 옷장에서 내가 지닌 것 중 가장 좋은 옷으로 갈아 입고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 비친 단정한 차림이 깔끔하니 보기 좋다.

풍경소리가 카페 안에 울린다. 오늘도 커피가 있는 나의 작업실 창가에서 글을 쓴다. 그리고 길고도 짧은 여행을 떠난다. 나는 꿈을 꾼다. 아름다운 오솔길을 걷는 한 여인이 보인다. 그녀는 그 길의 한가운데 잠시 머무르다-다시 길의 끝을 향해 걷는다. 천천히, 부드럽게 그리고 유연하게 앞을 향해 걷는 그녀가 웃는다. 그녀의 치맛자락이 미풍에 웃는다. 멀리 길의 끝이 보인다. 그녀의 걸음이 바람을 타고 물 흐르듯 가볍게 날아간다...


(사진출처-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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