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쳐진 우산 위로 타닥타닥 비가 온다. 오랜만에 듣는 빗소리이다.마음 같아서는 시원하게 쏟아져 도로 군데군데 얼어붙은 땅을 깨끗이 청소해 주면 좋으련만 비는 봄비 마냥 수줍게 대지를 적셨다
일을 마치고 오랜만에 비 오는 날의 정취를 맛보려 집 앞 두 정거장 전에 버스에서 내려 집 주변을 산책했다. 날씨는 춥지 않았고 적당히 걷기 좋았다.
비 오는 날이나 눈 오는 날이나 실내에서 밖에 풍경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이지만 오늘은 왠지 직접 빗소리가 듣고 싶었다.
큰 길가를 따라 집 방향으로 쭉 따라오면 낮은 동산이 있다. 주로 근처 주민들이 이용하는 운동로이자 산책로인데 큰비가 아니어서 그런지 오늘도 산책 나온 사람들이 제법 있다.
동산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 집으로 가려는데 누군가 등 뒤에서 내 어깨를 잡는다.
"맞네. 5호 예쁜이. 나야 6호 할멈."옆집 사시는 어르신이다. 우리 아파트는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로 내가 사는 층에는 주로 혼자 사시는 노인분들이 많다. 엄마 요양원 입소 전까지는 활발하게 왕래가 있었는데 엄마가 떠나시고는 옆집이라도 얼굴 뵙는 날이 어쩌다 한번-아주 드물다.
"산책 나오셨어요? 아무리 낮은 비탈길이라도 연세가 있으신데 빗길이라 미끄러울 수 있는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하시는 할머니라는 걸 알기에 걱정이 되었다.
내가 이 아파트, 엄마 집에 2013년에 들어왔으니 8년째 이 곳에 살고 있지만 옆집 할머니와 엄마와 그리고 나와 이웃 간의 정을 나누고 지낸 것은 불과 몇 년이 채 안된다.
이혼하고 친정에 들어온 내가 이웃사람까지 신경 쓸 겨를도 없었고 오로지 외부와 차단한 채 한참을 칩거 중이었으니 어떤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지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는 이웃과 음식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셨다. 주로 부침이나 쑥떡, 호박죽 등을 일부러 넉넉하게 하시고는 나눠드렸다. 엄마랑 합가 한 처음 마음이 아주 힘들 때 1,2년을 제외하고는 나도 그럴 때는 엄마를 도와 음식을 장만하고 직접 갖다 드리기도 했다. 혼자 사시는 분들이 많아도 정이 많아 서로가 가족처럼 지냈다.
그런데 우리 층에서 어울리지 못하는 한분이 계셨다. 우리 바로 옆집 6호 할머니. 사람들의 인사도 외면하고 내가, 엄마가 그리고 다른 사람의 호의나 음식도 다 거절하는 그 할머니-다른사람들을 못 믿는 괴팍한 노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엄마는 그래도 친구들이 좋아할 만한 별식을 만들 때는 되돌아올 것을 예상하면서도 옆집에 갖다 줄 것을 따로 챙겼다. 난 가끔 '그 할머니가 왜 마음이 닫혔을까?' 궁금했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차츰 6호 할머니를 잊어갔지만 엄마만은 한결같이 챙겼다.
지금 돌아보면 어느 때부터 옆집 할머니 마음이 열렸는지 정확한 시점은 모르겠다. 처음엔 엘리베이터에서나 복도에서 만나도 인사도 안 받던 분이 시간이 흐르니 인사도 받아 주시고 경계도 푸시고 "그런 거 안 먹어요."하고 싸늘하게 거절하시던 분이 고맙다고 받아주셔서 엄마와 나를 흐뭇하게 하셨다.
그것이 하나하나 시작이었다. 그 할머니는 처음 혼자되신 사연을 엄마랑 내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식과 함께 사는 엄마를 부러워하셨다.
남편분과는 젊었을 때 사별하시고 자식 없이 혼자 지내시는데 여러 번 사기를 당해서 사람을 못 믿으신다고 하신다. 불쌍하신 분이다. 친척이라곤 젤 가까운 분이 시골에 오빠와 조카들. 조카들도 못 미덥다 하시고...
어느 날 옆집 할머니께서 내게 부탁이 있다고 심각한 표정으로 찾아오셨다. 실버타운을 알아보시려 하는데 낼 마음에 들면 바로 계약을 하고 싶은데 보호자로 자식이나 조카가 동반되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렵게 부탁하신 마음이 짐작되어 흔쾌히 대답하였다. 할머니께서 환하게 웃으셨다. 다음날 목적지에 가서 결정은 못했지만 할머니도, 나도 마음만은 한결 편했다. 돌아오는 길 맛있는 것을 사주시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거지?"하고 피자를 주문해 주셨다. 그다음부터 옆집 할머니한테 내 별명은 예쁜 내 조카였는데...
엄마 아프시고 요양원 가시고 바쁘게 직장일 하랴 신경 쓰지 못했다. 쌈짓돈으로 용돈을 주신적도 있는데-마음은 과일이라도 사다 드려야지 -마음이 무겁다.
"이런 날은 운동 쉬세요. 눈 오는 날이랑 요. 이제 조심하셔야 돼요."
"내가 운동 안 하는 날이 죽는 날이야. 괜찮아. 참 엄마는 식사 좀 하셔?"
"요즘 통 입맛이 없으시대요..."
집으로 가는 동안 할머니와 엄마 얘기를 주로 나누었다. 내 얼굴이 상했다고 걱정해주시고. 다행히도 요즘은 여러 친구분들을 사귀어 어울리시는 모양이다. 얼마 전에 산책길에 사귄 친구 아들이 급전이 필요해 빌려주셨다고... 그랬더니 꽃이랑 과일 한 상자 사 왔다고 내게 말씀하시는데, 할머니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할머니, 아무한테도 돈 있다고 말씀하시지 마세요." 제발 나의 쓸데없는 기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집 앞에 도착이다.
"잠깐만 기다려!"할머니가 집으로 들어가시더니 배를 2개 가지고 나오신다.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 집으로 들어왔다.
마음이 복잡했다. 사람 때문에 마음에 빗장을 닫아 거신 분이 세상 속으로 나오셨다는 것은 나나 엄마가 바라던 바다. 그런데 할머니가 언제부턴가 운동길 친구들에게 여윳돈이 있음을 말씀하시고 빌려 주신다는 말에 엄마랑 내가 걱정스럽게"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한적 있다. 난 제발 나의 걱정이 지나친 기우였으면 좋겠다.
혼자서 이 험한 세상을 살아오셨다는 것은 짐작만 해도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알 수 있다.
난 옆집 할머니가 편안하게, 건강하게 사시다 돌아가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혼자된 나를 할머니가 나를 각별히 예쁘게 여긴 것처럼 나도 그분이 이모 같다.
사람의 인연은 무수히 많다. 옷감의 씨실과 날실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얽혀 하나의 직물을 짜 나가는 게 우리의 인생이다.
할머니와 나는 어디쯤에 연결이 되어 있을까?
점퍼를 입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새 비는 그쳐 있었다. 상가에 가서 딸기 한팩과 떡집에 가서 떡 3팩을 샀다. 아파트 입구에 경비실이 비어있다. 떡만 한팩 놓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