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by 예쁜손

얼마 전까지 엄동설한 추위였는데, 오늘은 바람이 몹시 부는데도 불구하고 봄이 오나 싶게 포근한 겨울날이다. 괜스레 봄기운이라도 맡을까 싶어 집 앞을 서성이다 햇볕이 좋아 벤치에 앉았다.

노상 오가는 길이지만 무심히 지나치기만 했는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잠시 앉아 쉬었다. 휴일이고 날씨가 좋아서인지 나와 같이 산책 나온 사람들이 많다.

저만치서 젊은 부부가 유모차를 끌고-서, 너 살쯤 보이는 여자아이를 앞장 세워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분홍색 점퍼에 하얀 방울이 달린 털모자를 쓴 아이는 귀여운 인형 같다.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내 앞을 지나갈 무렵 "아가야 안녕?" 하니 눈만 멀뚱멀뚱 쳐다보며 경계하는데 그 모습도 사랑스럽다.

옆에선 젊은 부부가 마스크 위로 웃으며 딸과 나를 바라본다. 햇볕을 즐기다 한기를 느껴 시간을 보니 채 30분이 안되었다. 날씨가 포근해도 겨울의 한가운데-1월 중순이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창문을 열고 포트에 물을 끓였다. 약간은 서늘한 상태에서 따끈한 물을 마시며 글을 쓴다.



두 시간쯤 흘렀을까. 항상 무심한 나를 살뜰히 챙기는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제철 음식인 톳으로 지은 밥과 김치찌개, 피자를 만드셨다고 직접 가져다주신다고 하신다.

어제도 잘 안 챙겨 먹는 내게 집밥을 해주신다고 초대해 주셨는데 내가 컨디션이 안 좋아 다음으로 약속을 미뤘더니 오후에 음식을 해서 분당서 내가 살고 있는 서울까지 갖다 주셨다. 우리 다른 한 멤버는 친정에서 수확한 쌀로 만든 떡을 한 보따리 들고 집으로 찾아왔으니 이들의 넘치는 사랑이 고마울 뿐이다.

"3시 50분까지 집 앞으로 나오세요. 날씨가 좋네요. 가까운 데로 드라이브시켜드릴게요." 휴대폰 너머 김 집사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경쾌하시다.

못 말리는 두 분의 사랑이다. 어제도 오늘도 피곤하다, 혼자 있고 싶다, 바쁘다 구구절절 있는 이야기 없는 얘기를 한 것이었는데-반은 사실이고 반은 미안한 마음에 거절한 것이었다.



"왜들 여기까지 또 왔어요?"

"답답해서 바람 쐬고 싶어서요. 그리고 밥같이 먹자고요." 미경 씨가 말한다.

"호호호 작가님, 잘 먹고 힘내야지 글을 잘 쓰지~"

김 집사님은 아직 작가 지망생인 나를 작가님이라 하시며 내 글의 열렬한 1호 팬이시다. 항상 진짜 내가 작가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할 때 용기를 주시는 분이시며 내가 글을 올릴 때마다 당신의 의견을 솔직히 가감 없이 말씀하시곤 한다. 작가란 호칭에 쑥스럽지만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날씨는 풀렸다 하지만 아직 강에 살 얼음이 얼어있다. 잔잔한 강물은 햇볕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인다. 바다는 바다대로 강물은 강물대로 이 세상 이름 있는 것들 모두는 제 나름대로 아름답다. 나도 그러하겠지...


10년을 나를 따라다닌 꼬리표는 우울증 환자였고 늘 나는 유리처럼 깨지기 쉬웠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궁금하지도 않았고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의 모습은 매사 자신 없고- 우울한-초라한 나였는데... 지금의 나는 편안하고 안정되고 행복하다. 흔들리는 삶 속에서 비로소 삶의 목표를 발견하고 두 다리를 땅속에 뿌리내린 기분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불과 두 달만의 일이다. 기적 같은 일이다.

말하지 못한 말, 무의식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던 나란 존재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글로 객관화시키는 작업은 퍼즐을 맞추듯 우울증 안에 감추어진 본래의 나의 모습을 찾아내는 과정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한편 한편 완성할 때마다 나는 잊었던 예전의 꿈을 다시 떠올렸다. 평생 글을 쓰고 싶다는-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간절한 꿈을 떠올리며 얼굴이 발그레 상기되었다.

지나온 삶의 상처와 아픔을 기억하며 적어 내려갈 때는 가슴이 쓰리면서도 담담하게 객관화하는 과정에서 내적인 치유가 일어났다.

두 달을 나의 생각의 편린들을 정리하고 써 내려가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마음의 상처가 회복되고 세상을 살아갈 힘과 용기가 생겨났다.

비록 무명의 작가 지망생이지만 잃어버린 희망을 찾아서 나는 지금 나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다.


세 여인이 모두 우연찮게 아침만 먹어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남양주의 정갈한 한식집이다. 오늘의 주제는 몰라보게 씩씩하고 당당해진 나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축하의 밥상이다. 나의 투병(?) 생활 전부를 아는지라 기적 같은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실업자 신세 5개월째라 마음 편하게 해 주시려고 내가 작가가 되면 밥을 사라고 하신다. 그전까지는 당신들이 사주신다고...

'제발 그날이 빨리 오면 좋을 텐데... '기도하는 마음이다. 아니다. 사실 좀 더디 오면 어떤가. 내가 글을 쓸 때 가장 나다워지고, 행복한데... 작가가 되는 것도 사실은 일용할 양식을 해결할 수 있어서 다른 일을 안 하고도 좋아하는 글쓰기를 마음 놓고 하는 것이지 작가로 부와 명예를 찾을 만큼 난 어리석지도 않고 욕심도 없다.

두 달 전의 나를 돌아본다. 꿈도 없이 하루하루 버티는 것만을 스스로 대견하다고 여겼었는데- 글쓰기의 시작(브런치 활동)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겠지만 나는 내 인생에서 하나의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이다.

꿈이 없는 사람은 영혼이 없고 죽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는 몸소 경험했고 다시 살아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길, 온 도시가 불빛으로 반짝인다. 하루도 저물어 간다. 글을 쓰는 것은 마냥 즐거운 작업만은 아니다. 때로는 엉클어진 실타래를 풀듯 가슴을 조여 오는 작업일 수도 있고, 근본적으로 혼자만의 고독한 사투이다. 언제나 사물과 사람을 꿰뚫는 안목과 관찰력을 지녀야 하고 삶에 대한 통찰력도 필요하다.

그래도 그곳으로 나는 가고 싶다. 내 재능이, 가능성이 솔직히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인생의 2막은 좋아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자 각오이다.

차창에 비친 미소 띤 내 모습이 도시의 불빛 사이로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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