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다이스 호텔, 지영이 자신의 연인 P와 주말마다 찾는 곳이다. 주변의 모텔들 보다 2만 원가량 비싼, 숙박이 8만 원인 이곳을 선호하며 적잖은 생색을 내는 P는 호텔이란 이름에 의미를 두려는 것 같았다. 사실 이름만 호텔이지 어느 정도 구색만 갖추고 있는 모텔 수준이었다. 새하얀 수건에서는 선명한 락스 냄새가 나고, 유명한 브랜드의 드라이기에 어렴풋 남은 손 때 자국, 전구 속에는 먼지와 죽은 벌레들이 비쳐 보였다. 호텔 이름이 적힌 번듯한 케이스에 든 샴푸와 트리트먼트를 선뜻 쓰기 찜찜한, 그런 호텔이었다.
지영은 자신의 바지 단추를 푸는 P의 손길에 시선을 두지 않고 늘 치르는 의식처럼 눈으로 셋톱박스, 휴지 곽, 거울 등 방안 곳곳을 훑어봤다. 불안한 마음의 지영을 흑백의 체크무늬 벽지가 옥좼다. 기하학적인 그 무늬들은 살아 움직이며 빙글 뱅글 도는 것으로 보였고 네모진 방을 둥글게 만들었다. 지영은 그것들에 둘러싸여, 늘 왠지 모를 공포를 느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녀는 사실 이곳을 싫어했다. 인위적인 고급스러움을 풍기는, 이 분위기가 싫었다.
국문학을 전공한 지영은 졸업 후 애써 무시해왔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겨우 취직한 출판사에선 그녀에게 커피 서빙 경력을 쌓아줬고, 이직한 회사에선 경리 업무를 맡으며 빨라진 타자 속도를 선물 받았다. 지영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고 늘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물려받은 가난이 있었고 원하는 것을 쫒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어느덧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잊어갈 때쯤, 소셜미디어에 짤막한 글을 적어 내려 가며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기 시작했고 그것은 지영에게 숨 쉴 구멍이 되어 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영의 한탄에 가까운 글은 인기를 끌었다. 그것들은 이 시대의 젊은 이들을 대변한다는 평을 받았고 서른이 된 해, 그녀는 그 짧은 글들을 엮어 첫 책을 출간했다. 그렇게 그녀는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서점에는 수많은 작가의 책들이 존재했고, 지영의 책은 단지 그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소셜 미디어를 쫒던 지영은 어느덧 30대 중반이 되었고, 더 이상 그 어떤 것을 대변한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단지, 차기작을 못 쓰는 작가에 불가했다.
P는 지영이 이름을 알리게 된 소셜미디어의 마케팅팀이었다. 머뭇거리는 지영과 달리 P는 대담했다. P는 지영을 출판사에 연결해주었고 그렇게 시작된 둘의 인연은 자연스럽게, 때가 되서라는 말 뒤에 숨어 지금의 호텔에까지 이르렀다. 유행이 시시각각 변하는 곳에서 일하는 P는 지영에게 인기 있는 메뉴를 골라주고, 사진이 잘 나오는 장소로 데려갔다. P는 그것을 자신의 무기라고 여겼고, 지영에겐 그것이 편리했다.
"... 다르다."
지영의 말에 거친 숨을 내쉬던 P가 고개를 든다. 풀어헤쳐진 옷을 하나둘씩 입기 시작하는 지영, 미묘하게 틀어진 무늬의 벽지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녀의 손 끝에서 마치 알약 모양의 초소형 카메라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을 손에 쥔 그녀는 생각했다. 하얀색과 검은색이 반반. 왠지 선택을 해야만 할 거 같다.
'네가 선택해.'
P는 지영에게 종종 말 끝마다 이 말을 덧붙였다. P는 그 말에 입을 꾹 다물고 얼굴이 붉어지는 지영을 보며 묘한 우월감을 느끼곤 했다. 어느덧 자신을 어필하던 P의 무기는 지영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P의 말에 지영의 입술이 꿈틀이기 시작했다. 범죄라도 저지른 양 쩔쩔매는 P의 모습이 지영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지영은 P의 무기가 하루 숙박료인 8만 원인, 자신이 싫어하는 이 호텔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았다. P는 그저, 트렁크 팬티 위로 손을 문지르며 지영을 온화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지영,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다. 머뭇거리는 P와 달리 지영은 대담했다. 망설임 없이 알약을 입 안에 넣는 그녀, 잘근 씹어 삼켜버린다.
"나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아."
지영, 왠지 글을 써내려 갈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