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부담은 덜고 마음은 나누고

프레임 리터러시 : 스무 번째 이야기

"엄마 힘든데 이번 추석은 식당 예약해서 밥 먹고, 집에서는 차만 마시자. 그리고 같은 시간에 모이는 거다."


언니의 제안에 누구도 거부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그대로 약속을 지켰다.


어릴 적 추석은 늘 북적였다. 새벽부터 부엌에서는 국을 끓이고 전 부치는 소리로 다른 때보다 일찍 일어났고, 달그락 그릇 소리와 함께 큰 상 위에는 끝없이 음식들이 쌓였다. 손님 맞을 준비로 분주한 엄마와 고모들의 얼굴에는 웃음보다 피곤함이 먼저 묻어났다.


명절은 분명 기쁨의 날이었지만, 동시에 여성들에게는 ‘시험대’ 같은 날이었다. 얼마나 정갈하게 많은 음식을 준비했는지, 손님 대접은 얼마나 깔끔했는지가 은근한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맏며느리로 시집가던 날, 부모님은 “명절에 고생할 텐데”라며 걱정하셨다. 나 역시 한때는 그 풍경이 고스란히 내 미래일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추석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과거에는 친척들이 며칠씩 묵어가곤 했지만, 이제는 멀리서 와도 한 끼 식사 후 차를 마시며 안부를 나누고 곧바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어떤 집은 아예 식당을 예약해 모임을 갖는다. 서로의 수고를 덜고 부담을 줄여주는 방식이 새로운 예의가 된 것이다.


그 변화 덕분에 명절이 다가와도 두렵지 않다.

부모 세대가 감당해야 했던 무게를 똑같이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예전 같으면 며칠 전부터 장을 보고, 새벽부터 일어나 음식을 차리고, 끝없는 설거지를 감당했을 텐데 이제는 다 함께 나누거나 간소화하는 분위기다. 덕분에 나 역시 연휴 기간 여행을 다녀오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히 내 경험만의 변화가 아니다. 실제로 최근 뉴스 보도에 따르면, 추석 차례상을 차리는 가정은 열 집 가운데 네 집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제는 전통을 지키는 것보다 실용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뚜렷해졌고, 명절을 대하는 방식 역시 그 흐름 속에서 새롭게 변하고 있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시끌벅적하게 며칠씩 함께 웃고 떠들던 추억은 점점 사라지고, 짧은 만남은 어쩐지 허전하다. 그러나 그런 시간 속에서도 진심은 여전히 살아 있다. 오히려 부담이 줄어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커지고, 서로에게 더 따뜻하게 다가갈 수 있다. 웃음이 늘고, 대화가 깊어진 것도 그 변화 덕분이다.


추석은 변했지만 달빛처럼 환히 차오르는 마음은 여전하다.

전통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게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변화를 나쁘게 볼 필요가 없다. 중요한 건 시간이 길고 짧음이 아닌 서로의 안부를 묻고 마음을 나누는 그 순간이다. 명절이 더 이상 의무와 부담이 아닌, 진짜 ‘만남의 시간’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새삼 느낀다.


추석연휴 마지막날 엄마 세대의 고단함을 떠올리며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둥근달을 바라본다. 아마 딸의 세대에서는 추석이 더 간소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달빛처럼 환히 가족을 비추는 마음과, 서로를 이어주는 정은 변치 않기를 소망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