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시간을 붙잡으려는 이유
세상을 들썩인 범죄자와 마이크를 들이민 기자가 찍힌 흑백사진 한 장.
그 기자는 그 장면이 유일하게 남은 자신의 취재 모습이라 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작년이었다.
꽤 긴 경력을 가진 기자였고, 누구나 알 만한 굵직한 사건들을 취재해 왔다고 했다.
대기업 CEO부터 정치인까지, 많은 유명인들을 직접 보았다고 했다.
뉴스에선 기사화된 단면만 보이지만, 현장에 있는 기자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니
뉴스에 나오지 않은 인간적인 순간도 더 자연스레 알게 된단다.
젠틀해 보이는 사람의 가식, 냉혹해 보이는 이의 소소한 친절과 해박한 면모 같은 —
어찌 보면 인간의 당연한 입체적인 면 같은 것들 말이다.
내가 물었다.
"그렇게 많은 유명인을 만나셨는데, 같이 찍으신 사진은 없으세요?"
"그게 좀 아쉬워요. 취재하러 가면 취재 인물은 많이 찍는데,
정작 취재하는 제 모습은 남은 게 없더라고요.
그나마 이거 한 컷 있어요."
그는 휴대폰에 저장된 흑백사진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오래전, 지방 법원 앞에서 찍힌 거예요.
그 범인이 처음 재판받으러 오는 날이었는데,
인터뷰 멘트를 따야 해서 서울에서 내려가 마이크를 들고 있다가
그 범인이 나타나자마자 제일 먼저 뛰어나가 마이크를 들이댔죠.
그 장면이 신문에 나왔어요.
그땐 무선 마이크도 없던 시절이라, 유선 마이크 줄을 길게 늘여 들고 뛰어갔었죠."
사진 속엔 유명했던 범인과 내 앞에 앉아있는 기자의 모습이 나란히 담겨 있었다.
체험 삶의 현장, 아니, 삶 그 자체의 현장이었다.
누군가의 인생을 쫓는 그의 모습도, 결국은 그가 주인공인 그의 인생이다.
문득 선배들의 퇴임식 코너 중 하나였던 '추억 사진 영상'이 떠올랐다.
주로 회사 워크숍, 체육대회, 봉사활동 사진들 속 단체사진 속에
퇴임의 주인공이 뒤섞여 있다.
나는 어떤가.
정리하진 않았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여행 사진, 소풍, 운동회, 회사 연수 같은 이벤트 사진은 그래도 어딘가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인생의 많은 시간들은 그런 이벤트가 아닌 날들로 채워진다.
학교 교실에서 수업을 듣던 모습, 청소하던 모습, 친구와 벤치에 앉아 수다 떨던 순간.
회사에서 모니터 앞에 앉아 일하고, 전화받고, 탕비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창밖을 보며 잠시 숨을 고르던 시간들.
이렇게 글을 쓰는 내 모습들.
그 어떤 연출 없이
순수한 집중과 고단함,
성취의 안도감과 쉼이 뒤섞여 흐르는
자연스러운 시간들.
그게 내 하루의 대부분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 순간들은 기록으로 남지 않았다.
누군가가 찍은, 회사 대표나 임원들이 센터를 차지하는 단체 사진 속 어딘가에 그들의 상대적 지위를 높여주는 배경 역할로 나도 한자리 차지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내 일상의 주인공으로 찍힌 기억은 거의 없다.
인생의 삼분의 일은 사회생활로 채워지고,
그중 삼분의 일은 일터에서 깨어 있는 시간이다.
주말은 집에서 쉬고, 평일은 일하고.
그 평범한 하루하루가 내 인생의 큰 부분인데,
그 시간들은 기록된 장면 없이 흘러가버렸다.
이제는 남겨두려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집, 방과 거실의 모습,
회사에서 내 이름표가 붙어 있는 자리,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내 모습.
매년, 아니 가끔이라도.
기록이 없으면, 시간이 흘러 돌아봤을 때
내 인생의 필름 중 많은 부분이 삭제된 기분일 것 같다.
마치 내 시간이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평범한 일상도 내 인생을 지탱하는 산소 같은 순간일 테지.
그래서 일상을 어루만지는 또 하나의 습관을 만든다.
사라지게 놓아둔 것을 후회하지 않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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