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12) 김천 황악산 직지사
오늘부터 2박 3일 부산 기장 여행이다. 한 달 전에 부산 기장에 있는 달음산 국립 자연휴양림을 예약해 두었다. 이 자연휴양림은 부산에서는 유일한 자연휴양림이다. 특별히 이곳을 택한 이유는 부산에는 최근 10년간 술 마시러 가는 일 말고는 그다지 가본 적이 없어 부산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최근 10년 동안 해운대, 광안리, 자갈치 시장 등을 여러 번 찾았으나 모두 부산역과 술집을 직행했을 뿐이었다. 또 하나는 이유는 지금은 멸치 철이라 멸치회를 다시 한번 맛보고 싶었다.
휴양림에 갈 때마다 늘 집에서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밤늦게 도착하곤 하였다. 이번에는 좀 일찍 출발하려 했으나 꾸물대다 보니 결국 10시 가까이 되어 출발하였다. 휴양림까지는 약 300킬로, 3시간 반이 걸리는 길이다. 단번에 가기는 부담스런 거리로 도중에 김천과 경주를 들리기로 하였다.
집을 출발하고 보니 차에 기름이 간당간당한다. 세종시에는 아직 주유소가 몇 곳 없다. 그래서 차에 기름을 넣을 때는 항상 불편하다. 집에서 남세종 IC까지는 10킬로 정도 되나 그 사이에 주유소는 한 곳도 없다. 고속도로 휴게소까지는 버틸 수 있겠지 생각하고 일단 출발했다. 요즘은 한 달에 두세 번씩은 여행을 가지만 매번 출발할 때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첫 번째 목적지는 김천 직지사이다. 직지사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71년 가보았으니, 꼭 50년 만에 다시 찾는 셈이다. 김천 IC를 나와 20분 정도 달리니 직지사가 나온다. 사실 직지사는 내게 여러 연결된 추억이 얽혀 있는 곳이다.
고등학교 때 나는 산악부 활동을 했다. 고2 때 11월 들어 지도교사를 포함한 10여 명 정도가 1박 2일로 직지사가 있는 김천 황악산으로 등산을 하기로 하였다. 당시 학교 산악부에는 그만한 사람이 함께 잘 수 있는 텐트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경북대학교 산악부에서 가지고 있는 15인용 큰 텐트를 빌리는 방법이었다. 학교에 등교를 한 후 주위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경북대학교를 찾아갔다. 그런데 만나기로 했던 산악부 선배가 나오지 않아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오후 늦게 겨우 텐트를 빌려 수업 종료 무렵 학교로 돌아왔다.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침에 잠깐 보였던 학생이 하루 종일 행방불명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담임선생님에게 교무실에 불려 가서 혼이 났다. 평소에 학생들을 잘 때리는 선생님이 아니라 교무실에 불려 가자마자 귀싸대기 한 대 맞은 걸로 더 이상 맞지는 않았지만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훈계를 들어야 했다. 특히 나의 학교 성적이 고등학교 입학 이후 일관되게 낮아지다가 고2 말기인 그 무렵에는 전교에서 바닥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성적이 떨어져 있어서, 오늘 일과 직접 관계가 없는 학교 성적까지 끄집어내어 온갖 훈계를 다 들어야 했다.
고3 때 대학에 합격한 후 인사를 위해 학교 교무실에 들렀을 때 마침 그 자리에 2학년 때 나를 혼낸 그 선생님도 계셨다. 내가 대학에 합격했다고 말씀드렸더니, 그 선생님도 대단히 기뻐하며 주위 선생님들에게 큰 소리로 자신이 이 학생을 얼마나 힘들게 바른 길로 인도하였는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다. 나는 속으로 선생님의 훈계와 나의 대학 합격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라 생각하였지만, 선생님의 자랑에 그냥 맞장구칠 수밖에 없었다.
이 기억은 지금까지 잊히지 않고 생생히 머리에 남아있다.
직지사는 황악산 중턱에 위치해있다. 직지사는 상당히 역사가 오래된 절이다. 5세기 신라 눌지왕 때 창건되고, 선덕여왕 때 중수되었다고 안내서에 나와있다. 그런대 이차돈이 6세기 때 사람이고, 이차돈의 죽음으로 신라에 불교가 들어왔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차돈에 수십년 앞서 벌써 신라에 사찰이 지어졌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뭐 더 따지지는 말자.
차에서 내려 직지사 경내로 들어가니 주위에 녹음이 무성하다. 불과 한 달전에 꽃구경을 한다고 돌아다녔는데 벌써 녹음이 짙어졌으니 계절의 흐름은 정말 빠른 것 같다. 그런데 직지사 경내로 들어갈수록 기억에 남아있는 직지사와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그 50년이란 세월동안 나무가 훨씬 울창해지고, 또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서 그런지 모르겠다. 여하튼 처음 찾은 사찰에 온 느낌이다.
요즘은 어느 사찰에 가더리도 마찬가지이지만, 도로 옆으로 보행로가 잘 만들어져 있다. 울창한 숲 사이로 나있는 보행로를 걸으면 숲의 진한 향기가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아카시아 꽃 향기같은 꽃내음이 코를 자극한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봐도 꽃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보통 절들은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이 나오고, 이곳을 지나면 강론을 하는 누각이 나오고 그다음엔 대웅전이 나온다. 이들 건물은 일직선상에 있는 것이 보통이며, 이 양쪽에 여러 부속 건물들이 위치한다. 그런데 직지사는 좀 특이하다. 이들 건물이 일직선 상에 있는 것이 이니라 모두들 조금씩 틀어져 있다. 그리고 다른 부속 건물들도 적당한 간격으로 정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건물들이 주위의 자연과 잘 조화되고 있다. 어지러운 듯하면서도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그런 느낌의 절이 바로 직지사이다. 직지사는 전통이 오랜 절이다 보니 문화재도 많다. 국보는 없지만 여러 점의 보물이 있으며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많다.
4월 초파일을 앞두고 있어 그런지 절 경내에 등이 가득 달려있다. 절 건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등이 고풍스러운 절의 풍광을 해친다는 생각이 들지만, 절로서는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이므로 관광객인 나의 입장에서 마냥 불평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등에는 가족의 이름과 주소 생년월일을 적은 표찰이 달려져 있다. 개인정보 보호에 그렇게 예민한 사람들이 이런 곳에서는 의외로 둔감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험한 부처님이 구태어 이름표를 달지 않더라도 누구의 등인지 잘 알터인데, 그렇게까지 상세한 신상정보 표찰을 달 필요가 있을지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대웅전 옆에 수국과 흡사한 꽃을 비운 큰 꽃나무가 보인다. 꽃은 아무리 봐도 수국 갇은데, 수국이 이렇게 큰 나무 일리는 없다. 물어보니 이 꽃은 <불두화>라고 한다. 그리고 꽃 모습으로 인하여 나무수국이라 하기도 한단다. 정말 탐스런 꽃이다. 나도 한번 심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내년에는 한번 심어 보아야겠다.
직지사는 비교적 좁은 터에 들어선 산사이다 보니 그다지 큰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건물의 숫자는 아주 많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건물의 수가 근 30개는 넘는 것 같다. 작은 건물들이 좁은 터에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서, 그러면서도 자연과 잘 어울리는 것이 직지사의 매력인 것 같다. 여하튼 건물의 수로만 따진다면 지금껏 봐온 사찰 가운데 직지사가 가장 많은 것 같다.
내려올 때는 계곡 옆의 길을 따라 내려왔다. 날씨가 완전 여름 날씨처럼 덥다. 시원한 계곡물을 보니 발 담그고 더위를 식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렇지만 우물쭈물할 시간은 없다. 바로 다음 목적지인 경주로 출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