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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Jul 29. 2024

알프스 산록에서의 거창한 만찬

(2024-05-21 화) 서유럽 렌터카 여행(47)

숙소로 가기 전 잠깐 장도 보고 주유도 하기로 했다. 이곳 슈퍼마켓에서 제일 사기 힘든 것이 우유이다. 요구르트나 치즈 등 다른 유제품은 눈에 잘 뜨이는데, 유독 우유를 찾기가 힘들다. 어제도 집사람이 1리터짜리 페트병에 든 우유라고 산 것이 알고 보니 요구르트였다. 벌써 두 번째였다. 이번엔 내가 고르겠다고 하고 자신 있게 lait 라 쓰인 1리터짜리 페트병을 집어서 계산대에 가져가 직원에게 확인하였다. 그랬더니 직원은 우유가 맞다고 하면서도 뭔가 복잡한 설명을 한다. 순수 생우유가 아닌 모양이다.


다음은 "공포의 주유" 순서다. 대형 몰에 있는 주유소를 찾아 주유기 앞에 차를 세우고는 키를 연료 캡에 꽂았다. 그리고 키를 돌려! 이게 웬일? 캡이 쑥 빠진다. 마침내 성공! 실로 감격적인 순간이다. 그런데 카드전용 주유기이다. 조심해야 한다.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 (어로)  카드를 꽂으시오..

집사람에게 받은 카드를 꽂았다.

- 카드를 뽑으시오.

카드를 뽑았다.

- 150유로까지 주유할 수 있습니다.

40유로 주유를 하였다.


이때 집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메시지에 150유로가 결제되고 또 40유로가 결제된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셀프 주유로 계산을 하면 먼저 15만 원이 결제된 후 주유를 마치고  나면 15만 원은 취소되고 실제 주유한 금액만큼만 새로 결제된다. 그런데 이번엔 150유로 결제취소 메시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이다. 며칠 전에 주유했을 때도 150유로와 실제 주유금액이 모두 결제된 후 지금까지 150유로에 대한 취소 메시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가 뭔가 기계 조작을 잘못하여 중복 결제되었나 생각하였다. 그래서 150유로를 그냥 날려버렸다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완전히 150유로를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숙소 주위 풍경

그런 상황이었기에 이번에는 기계를 세심히 보면서 기계가 하라는 대로만 하였다. 이번에는 절대로 실수가 없었다. 그런데 또 중복 결제되다니... 뭔가 새로운 메시지가 없나 하고 다시 기계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자 카드를 꽂으시오라는 문자가 뜬다. 역시! 카드를 다시 꽂아야 취소가 되는구나 생각하고 카드를 꽂았다. 카드를 뽑으시오. 뽑았다. 그랬더니 150유로 한도까지 주유할 수 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뜬다. 이런, 이건 새로운 거래로 넘어간 것이었다. 만약 여기서 다른 사람이 주유하면 그 사람의 주유비는 집사람의 카드로 결제되고 만다.


이 거래를 취소시켜야 하는데, 미치겠다!! 거래 취소가 안된다. 우리나라라면 어떤 자동결제 기계라도 마음만 먹으면 “취소” 버튼을 눌러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다. 그런데 이놈의 기계는 중도 취소 기능이 없는 거다. 지난번 자동 주차정산기도 그랬다. 뭔가 잘못 입력하였는데 중간에 취소가 안되는 거다. 보이는 보튼을 다 눌러보았지만 취소가 안된다. 거래취소가 되지 않기에 주유기를 들고 마냥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5분쯤 그렇게 서있었을까? 그제야 거래가 취소되었다는 메시지가 나온다.


집사람에게 물으니 이번에는 150유로가 결제되었다는 메시지가 나온 후 연이어 결제취소 메시지가 떴다고 한다. 그런데 앞의 150유로에 대해서는 여전히 결제취소 메시지가 없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확인해야겠다. 주유소 담당자를 만나기 위해 몰 안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업체가 입점하고 있어 누가 주유소를 관리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물어물어 겨우 대형마트 소비자 창구 당당자가 주유소 관리자란 것을 알아냈는데, 공교롭게도 대형마트가 오늘 휴점이다. 그냥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150유로는 결제취소 되겠지, 그렇게 믿고 있을 수밖에 없다.

숙소 베란다에서 보이는 알프스의 숲

이런 소동을 뒤로하고 숙소를 향해 출발했다. 숙소는 그레노블 시내에서 약 25킬로 거리에 있다. 시가지를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오르막 길이 시작된다. 한번 시작된 오르막 도로는 끝도 없이 계속된다. 차는 그냥 산속 도로로 달린다. 지금까지는 눈 덮인 산을 멀리서 보면서 달렸지만, 지긍은 그 산자락으로 들어간다. 이런 상태로 거의 40분을 달린 후 오늘의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궁금해서 먼저 고도계부터 체크하였다. 해발 약 1,800미터, 설악산 대청봉보다 높다.


숙소는 2층짜리  원룸 아파트이다. 이곳은 스키장 동네인 것 같다? 단독주택에서 아파트, 빌라, 콘도 등 여러 형태의 집들이 보이고 가까운 곳에 여러 개의 리프트가 보인다. 스키철이 아니라 현재 거주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집들은 많은데 사람들이 없다 보니까 마치 유령도시 같은 느낌도 든다.


숙소의 문을 열 수가 없다. 호스트의 말로는 키가 현관 옆에 있는 열쇠 박스에 들어있는데,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열쇠 박스가 열린다고 했다. 그러면 그 안에 있는 열쇠로 현관문을 열 수 있다는 거다. 그런데 패스워드를 바르게 입력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열쇠박스가 열리지 않는다. 도저히 열리지 않아 호스트에게 이메일로 연락하였다. 몇 번이나 서로 연락이 오갔다. 호스트는 영어가 전혀 안되기 때문에 전화통화는 불가능하다. 호스트가 하라는 대로 다 했지만 열리지 않는다. 정말 화가 치밀어 오른다.

30분 이상을 열쇠박스를 연다면서 끙끙대며 이렇게 보냈다. 이때 어떤 할머니가 니타나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그래서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그 할머니가 다가와 몇 번 손을 쓰더니 열쇠 박스를 열어준다. 그 열쇠 박스라는 것이 나는 처음 보는 것이지만 이쪽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익숙한 물건인 것 같다.


방에 들어갔더니 썰렁하다. 웬만한 건 다 갖춰져 있는데, 침대와 이불과 수건이 없다. 대신 제법 큰 소파가 하나 보여, 아마 그걸 펴면 침대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해봐도 소파가 펼쳐지지 않는다. 다시 호스트에게 이메일. 그러니까 호스트가 유튜브 동영상을 하나 보내준다. 동영상을 따라 하니 소파는 퀸사이즈 침대가 된다.


숙소의 창문 쪽은 베란다이다. 베란다로 나가니 알프스의 아름다운 풍경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옆쪽 봉우리를 향해 올라 가던 스키장 리프트는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아득한 멀리 보라색으로 보이는 산은 여전히 눈을 이고 있다. 알프스의 한복판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이제 오후 7시가 가까워 오지만 아직 대낮처럼 날이 밝다. 좀 차가운 듯 느껴지는 공기는 너무나 상쾌하다. 그동안 쌓였던 화가 조금씩 사그라든다.

산책길 풍경

집사람은 식사를 준비한다. 베란다에 식탁을 차렸다. 조금 전 마트에서 산 돼지고기구이이다. 삼겹살이 없는 대신 버터를 듬뿍 바른 프라이팬에 돼지고기 살코기와 소시지를 구웠다. 상추와 양파를 곁들이니 한국에서의 삼겹살 파티가 부럽지 않다. 5유로짜리 와인을 곁들이니 금상첨화이다. 가슴속에 치밀었던 화는 어느새 모두 사라져 버렸다.


식사 후 집사람이 설거지를 하는 사이에 집밖으로 나와 산책을 하였다. 100미터 정도 가니까 스키장 리프트를 타는 곳이 나온다. 스키장 슬로프는 4-5개 정도가 되는데 얼마나 높은지 꼭대기는 구름 속에 숨어있다. 빈 리프트만이 산 위를 올라가더니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날씨는 조금 쌀쌀한 듯 하지만 상쾌하기 그지없다. 한 시간 정도의 산책을 즐긴 후 숙소로 들어왔다.  


소파 커버로 이불을 대신하고 러닝셔츠로 타월을 대신하면 이것도 문제없다. 알프스의 품에 안긴 하룻밤인데 이 정도 불편은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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