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3 수) 서유럽 렌터카 여행(49)
오늘의 숙박지는 본느(Beaune)라는 작은 도시다. 이곳에 묵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 하루에 운전을 너무 많이 하면 피곤하므로, 적당힌 중간 기착지를 찾는다는 것이 이 도시로 된 것뿐이다. 리옹의 숙소에서 본느의 숙소까지는 약 170킬로이다. 내비로 찍어보니까 1시간 50분이 걸리는데, 유료도료를 타지 않으면 2시간 50분이라 한다. 내 운전으로는 4시간, 특별히 중간에 들를 곳도 없으니 딱 적당한 시간이다.
시간 여유가 있다 보니 느긋이 아침을 먹고 호텔을 출발했다. 약 20분에 걸쳐 복잡한 리옹 시가지를 빠져나오니 바로 시골길로 이어진다. 어제의 여행과 마찬가지이다. 넓은 벌판 사이로 난 도로를 여유 있게 달린다. 밀 아니면 보리, 그렇지 않으면 목초인 것 같은 푸른 밭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가끔씩은 몇 채씩 무리지은 농가도 보인다. 유료도로 제외가 탁월한 선책이었다.
아무리 달려도 산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완만한 낮은 언덕이 나타날 뿐이다. 이곳은 넓은 평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평평한 땅은 잘 보이지 않는다. 낮은 언덕들이 이어지면서 전체적으로 완만한 굴곡을 이루는 것 같다. 그러다가 한 번은 멀리 들판에서 20여 마리의 젖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푸른 벌판 위에서 움직이는 생물은 처음 보았다. 달리다 보니 군데군데 작물을 심으려고 정리해 둔 밭들이 나타난다. 고랑을 만드는 우리와는 달리 이곳에는 땅을 아주 평평하게 정리하여 작물을 심는 것 같다.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프랑스의 시골을 보면서 우리와 크게 다른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유럽의 농촌에서는 비닐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농촌에 가면 비닐하우스부터 시작하여 비닐 멀칭 등 온 들판이 비닐 투성이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서나 지저분한 폐비닐 쓰레기가 널려있는 것이 우리 농촌의 일반적 풍경이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유럽은 친환경적이고, 한국은 반환경적 농사라 이해하여야 하나?
아니다. 그만큼 우리나라가 손이 많이 가는 농업, 노동집약적인 농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농산물은 품질이 좋다. 과일의 예를 보자. 여긴 그냥 과실수를 심어 놓은 후 기껏해야 농약이나 치고 가지치기나 하는 정도로 끝나는 것 같다. 그런 후 저절로 열매가 열리고, 때가 되면 수확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다르다. 사과 한 알, 배 한 알, 포도 한 송이를 모두 사람 손으로 일일이 관리한다. 이곳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과일은 고품질로서, 달고 맛있다. 우리나라 과일에 익숙한 입으로는 여기 과일은 정말 맛이 없다.
비싸고 맛있는 사과를 먹을 것인가, 싸지만 맛이 떨어지는 사과를 먹을 것인가, 결국은 소비자가 선택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소비자에겐 맛없지만 값싼 사과란 선택지는 없다. 비단 과일뿐만 아니다. 대부분의 식료품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동소이하다. 고급품만을 강요당하는 한국 소비자들, 행복하다고 해야 하나.
시골도로를 달리다 보니 크고 작은 마을도 수시로 만난다. 100여 호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은 수시로 지나고, 한 번씩은 제법 큰 도시도 통과한다. 달리는 중 아름다운 강을 끼고 있는 제법 큰 도시를 만났다. 강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고, 주차장도 많이 준비되어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강변이라 차를 세우고 잠깐동안의 산책을 즐겼다. 도시 이름이 궁금했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벨르빌르 앙 보즐레'라는 긴 이름이었다.
이렇게 즐기면서 달리다 보니 시간이 한정 없이 늘어난다. 당초 4시간을 예상하고 달렸는데, 5시간이 넘어갈 것 같다. 어제 주유를 하지 않았더니 이제 주유할 때가 된 것 같다. 마침 대형마트와 함께 있는 주유소가 보인다. 나는 주유소로 가고 집사람은 마트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연료탱크 뚜껑을 열 수 있으려나? 성공이다. 연료탱크 뚜껑부터 시작해 주유와 정산까지 단숨에 깔끔하게 성공하였다.
대형마트로 갔다. 주위에 변변한 마을도 없는데 상당히 큰 마트이다. 여기엔 그동안 나를 속 썩게 했던 상품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10종류가 넘는 차량용 핸드폰 거치대가 있다. 그리고 그동안 사려다 못 산 운동화도 전시되어 있다. 식품과 함께 운동화를 새로 샀다. 그뿐만 아니라 내 불어도 멋지게 성공했다. 집사람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길래 캐쉬어에게 "훼얼 이즈 더 토일럿"이라고 물었다. 몇 번을 물었는데도 캐쉬어는 못 알아듣는다. 그래서 이번엔 "우 (송 르) 뜨왈렛뜨?", 그랬더니 "아! 뜨왈렛뜨"하며 손으로 가리켜 알려준다.
갑자기 벌판의 풍경이 바뀐다. 지금까지 벌판은 밀과 보리, 목초였지만, 갑자기 포도밭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좀 더 달리니 아득한 벌판 저 끝까지 전부 포도밭이다. 알고 보니 이곳이 와인으로 유명한 부르고뉴 지방이며, 부르고뉴 와인의 중심지가 바로 본느라 한다. 본느가 가까워 올수록 사방은 모두 포도밭으로 변한다.
본느 시내로 들어왔다. 본느는 인구 21,000명 정도의 작은 도시라 한다. 호텔에 짐을 풀고 시내 구경을 나갔다. 시골 소도시라 변변한 것은 없고 2개의 공원이 괜찮다고 한다. 그중 한 곳인 끄뤼조떼 공원으로 갔다. 공원으로 들어가니 제법 큰 연못이 나오고 그 주위는 온통 숲이다. 연못에는 야생오리 몇 마리가 놀고 있다. 연못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서는 하늘을 찌를듯한 큰 나무들이 서있다. 공원은 생각보다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연못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은 하늘을 덮고 있다. 정말 아름다운 공원이다.
공원 앞의 도로는 시내 중심지와 연결이 된다. 이곳은 옛날 성곽 도시였던 것 같다. 낮은 성벽이 있고, 성벽 바깥쪽을 따라 꽤 넓은 보행자 도로가 마련되어 있다. 여기엔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열을 지어 서있는데, 엄청나게 크다. 큰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늘어선 풍경은 정말 장관이다. 이렇게 멋있는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은 처음이다.
성곽 안으로 들어섰다. 이 역시 중세풍의 타운이다. 지금까지 보았던 다른 중세도시와 큰 차이점은 없다. 차이가 있다면 이 본느의 중세타운은 관광상품으로 개발되지 않은 것뿐이라 할 것이다. 이곳에도 역시 타운 중심에는 성당이 있고 광장이 있다. 다만 성당 이름은 "노트르담"이 아니다. 중세풍의 오래된 건물과 현대식의 대저택이 섞여있다. 정말 아름다운 도시이다. 프랑스의 농촌마을과 시골의 소도시를 보면 역시 프랑스가 선진국이란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오늘 오전 리옹의 아시아식품점에서 집사람이 방글라데시 라면을 사 왔다. 한국 라면을 사러 갔다가 없어서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나왔다는 것이다. 한국 라면은 한 봉지에 3유로인데, 이건 5봉지에 3.5유로이다. 처음으로 방글러데시 라면을 먹어보았다. 그런데 생각보단 꽤 괜찮다.
이탈리아에서부터 서북쪽으로 계속 이동해 왔기 때문에 해 지는 시간이 점점 늦어진다. 지금은 오후 9시인데 아직 해가 중천에 걸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