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이야기: 유럽의 당구 열풍
유럽의 중심지였던 프랑스에서 빌리어드가 성행하게 되자, 빌리어드는 곧 이웃나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힘과 경제력, 문화적으로 앞선 나라에서 어떤 게임이나 놀이가 유행하면, 이를 선망하는 주위의 다른 나라들이 곧장 따라 하게 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유럽 다른 나라 왕이나 귀족들도 그 당시 선진국인 프랑스를 따라 해야 속된 말로 “가오”가 서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16세기 이후 유럽의 왕실이나 귀족들 사이에 빌리어드 게임이 대유행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빌리어드의 원조답게 국왕인 샤를르 9세, 태양왕이라고 불리었던 루이 14세,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의 와중에서 프랑스 국왕 가운데 유일하게 사형에 처해졌던 루이 16세 등이 열렬한 당구 애호가였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국왕 제임스 1세가 당구를 즐겼다. 빌리어드는 남자만이 즐긴 것이 아니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치열한 왕위 쟁탈전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도 열광적으로 빌리어드를 즐겼다고 한다. 몸이 병약하고, 성격이 소심하였던 루이 16세는 의사의 권유로 건강을 위해 마지못해 빌리어드를 시작했는데 곧 빌리어드의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메리 스튜어드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녀에 대해 알아보자. 메리 스튜어트는 혈통만으로 따지자면 영국 최고의 왕실 혈통을 가졌다. 그녀는 태어난 후 9개월 만에 스코틀랜드 왕으로 즉위한다. 즉 첫돌도 맞이하기 전에 스코틀랜드 국왕이 된 것이다. 이후 유럽 각국 왕실에서는 그녀를 왕비로 맞아들이기 위해 치열한 다툼을 벌인다. 그렇지만 결국은 그녀는 당시 유럽의 최강대국인 프랑스의 국왕 프랑소와 2세의 왕비가 된다. 그녀가 16살 때의 일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는 잉글랜드의 제1위 왕위 계승자가 된다.
이 이야기를 듣고 “아니, 스코틀랜드의 왕이 프랑스 왕비가 되어 프랑스에 살면 스코틀랜드는 누가 다스리나?”라고 의문을 갖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시대는 왕이라고 해서 다 같은 왕이 아니다. 이 시대에는 프랑스는 유럽 최고의 선진국이며 정치의 중심지였던 반면, 영국은 변방의 보잘것없는 섬 나랴였기 때문에 프랑스 왕과 영국 왕 간에는 엄연한 격의 차이가 있었다.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왕들이 프랑스에서 살며 자기 나라를 통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심지어는 영어를 할 줄도 모르는 영국 왕도 있었다.
스코틀랜드 국왕에다 프랑스 왕비,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 1위라는 그녀는 당시 유럽 최고의 신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잉글랜드 왕위 싸움에서 엘리자베스 1세에게 패배하고, 그녀의 손에 참수형을 당하여 죽고 만다. 그렇지만 나중에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 제임스 1세는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국왕에 등극함으로써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 왕이 된다. 즉 통일 영국의 초대 국왕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 1세의 싸움의 최종 승자는 메리 스튜어트라고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이야기가 너무 옆길로 빠져버렸다. 다시 본론인 당구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때의 빌리어드는 실내 테이블에 게이트를 세워, 상아로 만든 공을 아치형의 관문을 통하여 구멍에 떨어트리는 게임으로, 지금의 당구와는 조금 다르다. 여하튼 빌리어드는 귀족적인 스포츠로서 상류사회에서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골프와 당구의 운명은 달라도 많이 다른 것 같다. 골프는 스코틀랜드 양치기 소년들이 심심풀이로 하던 공치기 놀이가 점차 고급 운동(돈이 많이 드는 운동)으로 발전되었던 반면, 당구는 귀족적인 게임에서 출발하여 가장 서민적인 게임으로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필리핀에서는 적은 돈으로 즐길 수 있기 때문에 당구를 “가난한 자의 게임”이라 한다고 한다.
이렇게 빌리어드는 그 발상지라 할 수 있는 프랑스에서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확대되었다. 빌리어드 인구가 늘게 되면 필연적으로 빌리어드 용품에 대한 수요도 늘어나게 된다. 게다가 빌리어드를 즐기는 사람들이 왕실 아니면 귀족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빌리어드 용품 구입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고급 빌리어드 테이블을 만들고, 상아 등 고급 재질로 만든 공을 즐겨 사용하였다. 이렇게 빌리어드를 즐기기 위해서는 당시 서민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돈이 들기 때문에, 유럽 전역에 빌리어드 열풍이 불었다고 하더라도 극소수의 왕가나 귀족들에 한정될 뿐이었다. 이후 빌리어드는 귀족들만의 특권적인 놀이로서 상당기간 상류사회를 중심으로 널리 성행하게 되었다.
17세기가 되면서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게 된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새로운 산업이 발전하게 되고, 유럽의 식민지 개척이 본격화되면서 산업의 중심이 과거의 농업이나 목축업에서 제조업이나 상업, 금융업 등으로 넘어왔다. 이렇게 되자 유럽 각 국가의 경제 권력도 크게 변화하였다. 기본적으로 귀족들은 토지를 바탕으로 농업이나 목축업이 그 경제적 배경이 되었다. 그런데 경제 및 산업의 중심의 변화함에 따라 귀족들의 부는 급격히 쇠퇴하는 반면, 제조업이나 금융업, 상업 등을 주업으로 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경제적 지위가 크게 높아졌다.
이들 부르주아들은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귀족들의 놀이인 빌리어드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였다. 이로서 빌리어드는 소수 귀족의 고급 취미에서 벗어나 점차 시민들의 놀이로 그 기반을 넓혀가게 된 것이다. 많은 사업가들은 물론, 법률가, 금융업자 등 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빌리어드를 즐기게 되었다.
빌리어드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신대륙, 즉 미국으로의 전파였다. 유럽은 아무래도 과거로부터의 전통으로 인해 신분사회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있었다. 부르주아들이 빌리어드를 즐기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절대적인 머리 숫자로 본다면 그들은 여전히 소수였다. 절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의 생활은 궁핍했으며, 빌리어드 같은 놀이를 꿈꿀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또 경제적 여유가 있더라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차별의 벽이 있어서, 일반인들이 빌리어드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달랐다. 새로 시작된 나라인 만큼 신분의 차이란 것이 없었다. 경제적 여유만 있다면 누구라도 빌리어드를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전형적인 대중문화 사회였다. 빌리어드는 미국으로 넘어오면서 급속도로 “대중의 놀이”, “대중의 스포츠”로 변화하였다. 이때가 19세기 중반 경이었다.
빌리어드는 유럽에서 시작되었으나, 점차 그 무대가 미국으로 옮겨졌다. 유럽인들도 빌리어드 대국이라면 단연 미국이란 사실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미국에는 1565년에 스페인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빌리어드 비슷한 게임이 전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정식으로 현대와 비슷한 빌리어드 게임이 붐을 일으킨 것 1850년 무렵이다. 이 때는 포켓 빌리어드, 즉 풀이 대유행하였다고 한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서도 워싱턴, 링컨, 제퍼슨, 죤 퀸지 아담스 등이 빌리어드를 즐겼다고 한다
세계 최초의 상업적 당구장은 미국에서 개장되었다. 1850년 경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 빌리어드 장이 개장된 것인데, 이 최초의 당구장은 영국식 포켓볼 당구장이었다. 1853년에 뉴욕에서 처음으로 공식 당구경기가 열렸다. 이때 시합은 당구대에 6개에 포켓이 있고, 백구와 적구 각각 2개씩을 사용한 게임이었다고 한다. 아마 풀(포켓볼)과 캐롬 당구를 혼합한 하이브리드 룰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