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ve 4. 겨울의 타워
무언가 핑 하고 유봄의 귀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것이 총알임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다짜고짜 한강 유람선, 아니 해적선에서 총격이 시작됐다.
“봄아! 엎드려!”
한동이 유봄을 감싸며 몸을 숙였다. 그들은 기다시피 이동해서 기둥 뒤로 숨었다.
유봄은 다급히 노인에게 물었다.
“시간을 돌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패턴이 바뀌었어. 그건 무언가 변화하고 있다는 뜻이야. 끝없이 반복되는 이 세상에는 변화가 필요하고 모든 변화는 위험을 수반하는 법이지.”
“네? 그게 대체 무슨 개가 풀 뜯어 먹는 소리예요?”
“마지막으로 밥 한 끼를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보내게 된 건 아쉽긴 하지만 모든 준비는 완벽하게 되어 있어. 이대로 출발하거라!”
역시 미치광이 노인네였어! 사람이 쉽게 변하는 거 아니라니까! 유봄이 한마디 쏘아주려 할 때 노인이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접어 건넸다. 파도의 모서리 위치가 표시된 지도였다.
“이걸 가져가. 꼭 필요할 때 사용하도록 해.”
“이 와중에도 여기에 남겠다고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이 단호했다. 그때 기둥 너머를 엿보고 있던 한동이 외쳤다.
“지금 가야 해! 더 가까워지면 위험해!”
유봄은 노인의 양손을 꼭 잡고 말했다. 기대 이상으로 손이 따뜻했다.
“살아서 다시 만나요.”
노인은 말없이 자신의 손목시계를 풀어 유봄의 손목에 채웠다. 날짜가 표기되어 있는 전자식 손목시계였다. 유봄은 노인과 짧은 작별인사를 마친 뒤 한동 옆에 섰다. 유봄이 준비되었음을 확인한 한동이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신호하면 동시에 배로 뛰어! 셋, 둘, 하나, 가자!”
두 사람이 달리기 시작하자 해적선에서 다시 총격이 시작됐다. 총알이 땅에 맞아 팝콘처럼 튀고 있었다. 마치 총격이 자신을 뒤쫓아오고 있는 것 같은 섬찟한 느낌을 받으며 유봄은 필사적으로 달려 선실 안까지 뛰어들었다. 함께 뛰어들어온 한동이 핸들을 잡는 순간 와장창 하고 선실의 창문이 깨지며 유리 파편이 튀었다. 총격이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다.
“봄아, 숙이고 있어.”
한동이 시동을 걸려고 다급히 키를 돌리며 말했다. 하지만 배는 쿨럭거리기만 할 뿐 좀처럼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시동을 거는 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오히려 그 모습이 유봄을 침착하게 만들었다.
‘너도 이렇게 무서우면서.’
유봄은 떨고 있는 한동의 손을 가만히 잡아서 내린 뒤 차분히 시동 키를 잡고 돌렸다. 비로소 보트가 덜컹거리면서 힘찬 엔진 소리가 들렸다. 시동이 걸린 것이다. 유봄이 자신의 생존수칙 제1조 ‘상어에게 물려가도 침착할 것’을 몸소 실천해 보이자 한동의 표정도 눈에 띄게 안정되었다. 유봄은 자신을 바라보는 한동에게 ‘하지만 보트 운전은 못해’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한동은 최대한 자세를 낮춘 채 핸들을 잡고 보트를 출발시켰다. 두다다다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보트가 물살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해적선 옆을 지나치는 순간 유봄은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해적과 눈이 마주쳤다. 멀리서도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전히 홍건적처럼 붉은 복장을 입고 있는 그는 그때 그 해적 선장이었다.
‘저 인간 원래 대화를 즐기던 타입 아니었나? 다짜고짜 총격이라니 그새 MBTI 유형이 바뀐 거야?’
보트에 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해적선과는 일시적으로 거리가 벌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해적선도 곧바로 선회하여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따라 잡히지는 않았지만 좀처럼 거리가 벌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실이 있는 동쪽 방향으로 곧장 향했다. 창문이 깨져 마치 오픈카처럼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긴 했지만 이대로 달리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곧 그건 안이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멀리 63빌딩이 보이는 여의도 방향에서 작지만 속도가 빠른 요트형 해적선들이 여러 척 나타났다.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람선에서 지원을 요청한 것 같았다. 아니면 미리 대비하고 있었거나.
서쪽에서는 유람선이, 동쪽에서는 요트들이 포위망을 짜며 다가오고 있었다. 유봄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쟤네 목적이 대체 뭐야?”
“미안해. 나를 쫓아온 것 같아. 너한테 가기 전에 해적들과 교전이 있었거든. 따돌린 줄 알았는데….”
대답과 함께 한동은 북쪽으로 핸들을 재빨리 틀었다. 원심력에 의해 몸이 오른쪽으로 크게 기울어지는 것을 느끼며 유봄은 권총을 꺼내 들었다.
두 사람이 향한 방향에는 마포가 있었다. 마포는 지대가 높고 해수면 위로 솟아 있는 빌딩과 아파트가 많아서 작은 보트가 몸을 숨기기에는 최적이었다. 마치 물 위에 세워진 수상 도시 같았다. 일단 해적 선장이 타고 있는 거대한 유람선부터가 아파트 단지 안쪽으로는 진입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동은 대로를 따라가지 않고 일부러 아파트 단지 사이로 보트를 몰았다.
그들은 시멘트로 이루어진 복잡한 숲 속을 이리저리 누비면서 한참 동안 해적선들과 숨바꼭질을 했다. 하지만 조용한 아파트 단지 사이로 강렬한 엔진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기에 해적선들을 따돌리는 게 쉽지는 않았다.
집요하게 추적해오는 해적선들을 피해 두 사람은 대로를 가로질러 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진입했다. 비정형으로 언덕의 굴곡을 따라 길게 건물들이 뻗어 있는 대단지였다. 불길하게도 단지 안쪽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건물 높이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마치 언덕을 타고 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코너를 돈 순간 눈앞에는 반쯤 물에 잠긴 놀이터가 펼쳐졌고 그 끝에는 육지가 있었다.
막다른 길이었다. 배가 산으로 간 셈이다.
“이제 어떡하지?”
뒤에서는 해적선들의 엔진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동은 대답 대신 비장한 표정으로 소총을 장전했고, 그걸 본 유봄도 권총을 꺼내 들었다. 단 한 발만 실탄, 이후에는 총알이 있는 척 연기력으로 승부해야 했다. 물론 대치상황이 만들어져야 연기라도 할 수 있었다. 아까처럼 다짜고짜 총을 쏘기 시작한다면 연기를 할 기회조차 없었다.
“내 인생에 총격전을 준비하는 순간이 올 줄이야.”
긴장을 풀기 위한 유봄의 푸념에 한동이 피식 웃었다.
“동이, 넌 몇 발 남았니?”
“스무 발 정도?”
“난 한 발뿐이야.”
“알아. 꼭 필요할 때만 쏘고 내 뒤에 숨어 있어. 총을 가진 해적들은 거의 없거든. 기회를 봐서 해적선으로 옮겨 타자.”
난이도는 무척 높았지만 듣기에 나쁘지 않은 작전이었다. 일단 다른 방법이 없어 시도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다가올 전투를 준비하며 호흡을 고르고 있는 그때 바로 옆의 아파트에서 드르륵 하며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총을 겨눴다. 누군가 창문에서 몸을 내밀었다.
“어? 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