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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닝리 Jan 07. 2022

파도의 모서리 16. 노마드

Wave 4. 겨울의 타워




 “어? 너는 그때 그 선크림? 살아있었구나!”


 반가운 표정을 짓는 여자를 유봄도 알아보았다. 지난 여름 잠깐 마주쳤던 바다의 노마드였다. 마주친 시간은 짧았지만 워낙 여성 노마드가 드물었고 유봄에게는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 얼굴이 기억에 똑똑히 새겨져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해양 유목민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겨울을 나기 위해 마포에 정착한 모양이었다.


 “강북으로 가신다더니 여기였군요!”

 “넌 결국 잠실에 갔나 봐. 게다가 군인 친구도 생겼네?”


 그러고 보니 롯데타워는 군인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려준 것도 이 노마드였다. 물론 타워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취지로 정보를 준 것이었지만 유봄은 오히려 그 말을 듣고 잠실로 향했고 지금은 무려 두 번째로 타워에 돌격하는 중이었다. 유봄도 여성을 다시 만나 내심 반가웠지만 아쉽게도 담소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지금 저희가 해적들한테 쫓기고 있어요!”


 때마침 유봄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멀리서 모퉁이를 도는 해적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척, 두 척, 세 척. 도합 세 척이었다. 아뿔사! 한 척이라면 한동의 작전처럼 어떻게 탈취를 시도할 수도 있겠는데 적이 너무 많았다. 그제야 노마드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처럼 표정이 굳었다.


 “도와줄게! 어서 이쪽으로 건너와!”

 “안 돼요! 배를 버릴 수 없어요!”

 “버려야 해! 그래야 살 수 있어!”

 “못 버려요! 잠실로 꼭 가야 해요!”

 “그러다 죽어! 어쩌려고 그래?”

 “하지만!”


 시시각각 해적선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결연한 표정의 유봄을 한동안 지켜보던 노마드도 곧 무언가를 결심한 듯 말했다.


 “그럼 내가 거기 타도 될까?”

 “안 됩니다!”


 안 된다고 즉답을 한 사람은 한동이었다. 한동은 작은 목소리로 유봄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을 어떻게 믿고?”


 물론 쉽게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세상이긴 했다. 하지만 유봄은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노마드는 보통 타인에게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철저한 개인주의자들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남들이 어떻게 되든 자신이 살아남을 길부터 챙기는 게 생존한 노마드들의 습성이었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은 흔히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만큼 지금의 행동에는 믿을 만한 구석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나를 믿고 태우는 걸로 하자! 타세요!”

 “내 이름은 설하나야. 믿음에 부응하도록 최선을 다할게.”


 설하나라는 이름의 노마드는 곧바로 창문을 뛰어넘어 보트에 탔다. 유봄의 빠른 결정과 설하나의 빠른 탑승에 한동은 입만 뻐끔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는 유봄, 얘는 제 친구 한동이에요. 이제 어떻게 하면 되죠?”

 “내가 잠깐 운전대를 잡을게.”


 순식간에 통성명이 끝나고 한동을 가볍게 밀치며 운전대까지 잡은 설하나는 곧바로 보트를 몰아 아파트의 동과 동 사이의 작은 틈새로 향했다. 보트 하나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의 작은 틈새였다. 여기로 빠져나가겠다고?


 “이건 자살행위예요!”


 한동이 소리쳤다. 해적들은 포위전에 능했다. 좁은 틈새를 빠져나가게 되면 보트의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고, 만약 틈새에 갇힌 채 포위를 당하게 된다면 다른 곳으로 도망칠 방법조차 없었다.


 “자자, 진정하시고, 조금만 더 갈게.”


 틈새에 진입한 설하나는 천천히 보트를 몰더니 골목의 한가운데에서 멈췄다.


 그렇다.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멈췄다.


 그러고는 설하나는 핸들을 버려둔 채 갑판으로 뛰어올라갔다. 마치 ‘나를 쏘시오!’ 하며 자기가 해적들의 표적이라도 되겠다는 기세였다. 절망에 찬 표정을 짓는 한동을 뒤로한 채 유봄도 설하나를 따라 갑판으로 뛰어올랐다.

 

 “분명 여기쯤이었는데….”

 

 설하나는 보트 아래 찰랑찰랑 흔들리는 바닷물 사이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고, 유봄도 그 시선을 좇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파도의 모서리잖아?”

 “찾았다! 워프 존(warp zone)이야!”

 “네?”

 “보면 알아!”

 “아니, 그러니까!”


 두 사람이 찾은 건 같았지만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그 순간 탕 하고 총소리가 났다. 한동이 뒤를 쫓아온 해적선을 향해 발포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곧 골목 앞쪽에서도 해적선이 나타났다. 이제 앞뒤로 포위되어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었다. 역시 해적들은 포위전에 능했다.


 유봄은 앞쪽에 나타난 해적선에서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여전히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 야수 같은 외모와 눈빛. 오리배에 올라타 유봄을 식칼로 위협했고, 다른 우주에서 추월 노인을 살해했던 그 해적이었다. 그 잊을 수 없는 얼굴의 해적이 이번에는 식칼 대신 장총을 들고 서 있었다.


 유봄도 권총을 들어 그를 마주 겨냥했다. 그 상태로 시간이 조금 흘렀다. 왜 저들이 바로 총을 쏘지 않고 굳이 대치하고 있는 것인지 슬슬 의문이 들 무렵, 야수 같은 해적 뒤에서 붉은 옷을 입은 해적 선장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타났다.


 “아가씨, 다시 만나니 무척이나 반갑군.”


 그제야 왜 해적들이 이토록 집요하게 여의도에서 마포까지 추격해 왔는지를 깨달았다.


 ‘동이가 목적이 아니었어! 나한테 복수하러 온 거구나.’


 “우린 정산해야 할 게 있지?”


 해적 선장이 야수 같은 해적에게서 장총을 빼앗아 들고 이쪽을 겨냥했다. 유봄이 표적이라는 건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야수 같은 해적은 선장에게 표적을 양보한 것이었다. 먼저 쏘아야 했다. 절대로 조준에 실패하면 안 되는 단 한 발이었다. 해적과 유봄이 동시에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설하나가 손을 아래로 늘어뜨려 파도를 만졌다.


탕?!






 “끼룩끼룩.”


 마땅히 났어야 할 총소리 대신 어디선가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햇살도 찬란히 눈부셨다.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니 망망대해였다. 혹시 시간을 되돌렸나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유봄도 한동도 설하나도 보트에 타고 있던 마지막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봄은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잠시 후 설하나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하, 이렇게 큰 배도 되는구나! 이 방법이면 유람선도 탈취할 수 있겠어.”


 정신을 차린 유봄이 질문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죠?”

 “말했잖아. 워프 존이라고! 거기서는 공간이동을 할 수 있어! 이건 정말 업계 기밀인데 특별히 너희한테만 보여준 거야.”

 “네? 공간이동이라고요? 파도의 모서리는 과거로 시간을 되돌리는 곳인데….”

 “뭐? 시간을 되돌린다고?”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얼마간 침묵의 시간을 보낸 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심각한 정보의 비대칭이 있음을 깨닫고, 하나씩 알고 있는 정보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유봄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파도의 모서리가 시간 복제 외에도 공간 도약의 기능이 있다는 것이었다.


 유봄은 주머니에서 추월 노인이 준 지도를 꺼냈다. 설하나는 워프 존이 거미줄 모양이라는 사실에 꽤 놀란 모양이었다. 그동안 서울의 북서쪽에서 남동쪽을 관통하는 직선거리의 이동만 경험한 것이다. 설하나에 따르면 워프 존, 즉 파도의 모서리에서는 마치 지하철처럼 한 정거장씩 직선으로 ‘시간 변화 없는 공간 도약’이 가능했다.


 이건 중요한 정보였다. 어쩌면 이번 패턴 변화로 얻어낸 가장 큰 성과일지도 몰랐다. 만약 서른세 번째의 자신이 실패하더라도 이 정보를 추월 노인에게 꼭 전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네 번째의 자신이 한 발짝이라도 더 미래를 향해 전진할 수 있도록 말이다.


 “언니. 부탁이 하나 있어요.”


 유봄은 지도를 설하나의 손에 쥐어주면서 파도의 모서리에서 공간 도약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추월 노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노인은 뭐 하는 사람인데?”

 “음, 과학자? 마법사? 미치광이? 아니, 아무튼,”


 유봄은 자신이 겪은 일을 설하나에게 처음부터 설명했다. 원래부터 정착민보다는 유목민 성향이 강했던 설하나는 흔쾌히 마포를 버리고 영등포로 가겠다고 했고, 지도를 보며 모서리 길을 따라 도약할 경로를 고민했다. 보트는 유봄과 한동이 사용해야 했기에 맨몸으로 도약해 겨울바다에 빠져 심장이 얼어붙기 전 다음 도약을 해내야 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무사히 도착만 잘 해낸다면 그곳에는 이 겨울을 거뜬히 나고도 남을 만큼의 풍부한 식량과 자원이 있다는 사실이 설하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듯했다.


 “그곳에 햄과 참치가 있단 말이지?”

 “햇반도 엄청 많아요.”

 “유목민이 언젠가 정착할 유토피아가 있다면 바로 그런 곳이지. 유봄아, 돌고 돌다 살아서 또 만나자!”

 “고마워요, 하나 언니!”


 어느새 언니 동생으로 호칭을 정리한 두 사람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는 한동의 등짝을 후려친 뒤 구명조끼 하나만 달랑 걸친 설하나를 전송했다. 익숙한 솜씨로 정확히 필요한 물건들만 가지고 바다 위에서 공간을 잘라 도약하는 설하나의 모습은 감탄을 자아냈다. 저 정도로 미세한 조정이 가능하다니 뭔가 감각적인 재능이 있다고 봐도 좋을 것 같았다.


 유봄은 설하나가 떠난 파도의 모서리를 다시 만져봤지만 아무리 해도 유봄에게는 복제된 과거의 시간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일까? 유봄은 역시 4차원이란 인간의 지성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설하나가 떠난 보트에는 다시 유봄과 한동, 두 사람만 남았다.


 “그럼 우리도 갈까?”


 한동의 물음에 유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잠실로 향했다.




>> 다음 편에 계속 >>

서울 인사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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