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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닝리 Jan 19. 2022

파도의 모서리 18. 거미

Wave 4. 겨울의 타워




 문을 열자마자 이마에 차가운 금속성 물체가 닿았다.


 “이게 누구신가?”


 철컥! 총알이 장전되는 소리. 그 물체의 정체는 총이었다.


 “라면 냄새를 따라왔더니 의외의 선물이 있었네? 그때 내가 너 때문에 해명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잊을 수 없는 선글라스, 모기철 대위였다. 그가 권총으로 유봄의 이마를 겨냥하고 있었다.


 ‘여름도 아닌데 모기가 기승을 부리네. 그런데 대체 누가 누구 때문에 고생했다는 거야? 입이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유봄은 곧바로 권총을 들어 맞겨냥하려 했지만 모기철 대위가 배를 세차게 걷어차는 바람에 넘어져 나뒹굴었다. 유봄의 권총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고 모기철 대위는 여유롭게 그걸 집어 들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당직사관실의 문이 열렸다.


 “모 대위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별것 아닙니다. 잃어버린 걸 다시 찾았을 뿐입니다.”


 그는 느끼하게 씨익 웃으며 유봄을 쳐다봤다. 여전히 사상 최악의 남자였다. 유봄의 총에서 탄창을 꺼내더니 남은 총알을 확인했다.


 “한 발밖에 안 남았네? 축하해. 너도 이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살인자가 되었군. 덕분에 민간인을 죽였다는 죄책감은 가지지 않아도 되겠어.”

 “아무도 죽이지 않았거든요?”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하수진 중위님은 무사하신가요?”

 “무사하겠냐? 내가 그 년을 가만히 내버려뒀을 것 같아?”

 “나쁜 새끼.”


 유봄은 이를 악물며 선글라스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모기철 대위는 입꼬리를 찢어올리며 씨익 웃었다. 그때였다. 한동이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다가와서 모기철 대위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한동 병장? 이게 무슨 짓이지?”

 “동아!”


 유봄이 한동을 부르자 모기철 대위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이었다.


 “둘이 무슨 사이지?”


 한동은 대답하지 않고 유봄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 틈에 유봄은 재빨리 일어났다.


 “당장 총 내려놔. 즉결처분으로 사살되기 싫으면.”

 

 모 대위의 싸늘한 말투에 잠깐 동안 긴장감이 넘치는 팽팽한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이윽고 한동이 포기한 듯 천천히 총을 든 손을 내렸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유봄의 손을 꼭 잡았다. 손이 따뜻했다.


 ‘다정해라.’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한동이 입으로 말했다. 목소리는 없었지만 그 입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 도망가.


 ‘아니, 동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 상황에서 나에게 도망가라니?’


 그 순간 한동이 유봄을 왈칵 비상계단의 철문 안으로 밀어 넣고는 문을 쾅 닫아버렸다. 닫힌 철문 뒤에서 유봄은 끔찍하게 울려 퍼지는 총격 소리를 들어야 했다. 목구멍에서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아!”


 유봄은 철문을 다시 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고민하거나 망설일 시간이란 사치에 불과했다. 한동이 목숨을 걸고 열어준 기회를 살려내야 했다. 유봄은 뒤돌아섰다. 희미한 불빛을 어둠 속에 뿌리고 있는 손전등을 바닥에서 집어 들었다. 눈앞에는 비상 계단이 있었다. 다시 선택의 순간이었다. 위로? 아래로?


 위로 오르게 된다면 적당한 층에 숨어들어 추적자를 따돌린 다음 다시 기회를 봐서 부두로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이곳의 지리를 모르는 유봄 혼자서 곳곳에 지키고 있을 군인들을 따돌리며 돌파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모기철 대위도 아마 위로 뒤쫓아올 것이다. 한동 없이 혼자서 성공할 확률은 희박했다.


 반면 아래층은 계단 중반부터 물에 잠겨 있어 처음부터 정상적인 선택지로 보기 어려웠다. 물론 조금 전 유봄은 아래층으로 잠수를 시도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그건 배가 정박되어 있는 부두에서 잠수할 때의 얘기였고 문제는 지금 이곳이 비상계단이라는 것이었다. 계단실에서 아래층으로 잠수해서 철문을 열고 나갈 수 있을까? 하지만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못할 일이 뭐가 있으랴.


 ‘에라 모르겠다. 해볼 수밖에!’


 유봄이 비상용 손전등을 들고 몇 계단을 내려가자 금세 차가운 바닷물이 신발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벗을 수는 없었다. 물 위에 떠다니는 신발을 보면 뒤쫓아온 군인들이 곧바로 유봄의 위치를 눈치챌 것이었다. 몇 걸음 더 내려가자 어느새 허리께를 지나 가슴께까지 물에 잠겼다. 심장이 멎을 것처럼 저릿저릿한 오한이 일었다. 예전의 나는 추운 게 싫어서 평생 냉탕에 들어가본 적도 없었는데! 하지만 이제 와서 무를 수는 없었다. 아래층 철문의 위치를 마지막으로 수면 위에서 확인한 후 유봄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잠수를 시작했다.


 유봄은 수영을 곧잘 하는 편이었다. 어릴 때 배운 것을 몸이 기억하기도 했지만 대학교 때 수영 수업을 들으면서 자신감이 더 붙었다. 육상동물인 인류가 수영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수백 가지가 있었겠지만, 그중 지금처럼 지구가 바다에 잠길지도 모른다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리라. 만약 유봄이 과거로 돌아가서 수영 교사가 된다면 물안경 없이 수영하는 법부터 가르칠 것이다. 수영을 할 줄 알더라도 바닷물 속에서 눈을 뜨는 법은 무척 고통스럽게 습득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아래층 철문에 손이 닿은 유봄은 손잡이를 내려 당겼다. 물속에서는 힘이 잘 안 들어가 발로 벽을 밀며 열어야 했다. 다행히 큰 무리 없이 문이 열렸다. 유봄은 손과 발을 저어 앞으로 나아가며 서둘러 파도의 모서리를 찾았다. 하지만 물속은 탁하고 어두웠고 사물들의 형체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모서리가 있더라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게다가 서서히 호흡이 달리기 시작했다.


 유봄에게 익사의 공포가 찾아오기 시작할 때쯤 건물 가운데에 천장이 부서져내려 작은 구멍이 뚫린 곳이 보였다. 그곳에서 머리를 내밀면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숨이 끊어지는 고통 속에 허겁지겁 팔을 휘저어 그곳으로 헤엄쳐 갔다. 하지만 도착한 유봄은 곧 절망에 빠졌다. 천장은 단단하고 멀쩡했다.


 ‘신기루였나?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구나.’


 마지막 숨이 다하며 벌컥 물을 들이마셨다. 왜 인간은 아가미 호흡을 할 수 없는가! 인류의 진화과정을 원망하던 그때 유봄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분명 유봄은 천장이 내려앉은 것을 똑똑히 보았다. 자신이 헛것을 본 게 아니라면? 아마도 공간이 왜곡된 것이다. 물론 유봄은 그런 현상을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 희망을 안고 폐를 찌르는 고통 속에서 팔을 허우적대며 필사적으로 파도의 모서리를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에 손이 닿았다.


 유봄은 ‘연결’되었다.




 ‘그곳’에는 1년 전의 시간들이 있었다. 유봄이 따릉이를 타고 한동을 만나러 가던 시간이 있었다. 비록 다시 사이렌이 울리고 해일이 밀려오겠지만 유봄은 원한다면 ‘지금’ 바로 그곳으로 돌아가서 한동을 다시 기다릴 수 있었다. 유봄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유봄이 연결된 것은 그저 낱개의 모서리가 아니었다. 모든 모서리는 ‘이곳’에서부터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이곳은 모든 모서리를 이어주는 중심부였고, 이곳에서는 1년이라는 우주 전체를 복제해서 재구축할 수 있었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과거의 기억과 과거의 몸으로 재구축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모든 기억을 잊은 채로 말이다. 유봄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이 모든 우주를 1년 전으로 되돌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지금보다 잘할 수 있을 텐데! 한동에게도 노인에게도 설하나에게도 개나리에게도….


 그 순간 유봄은 깨달았다.


 지금까지의 모든 우주는 유봄의 우주였다. 노인이 서른세 번이나 반복해서 겪었다는 그 모든 우주가 이곳에 복제되어 있었다.


 ‘내가 거미였어.’


 영원한 회귀. 이 세계의 1년을 무한히 되돌려 반복시킨 주체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유봄이었다. 이번에도 되돌릴 경우 또다시 우주는 처음부터 시작되고 아마도 가을쯤에는 노인과 서른네 번째로 만나게 되리라.


 ‘시간을 되돌리지 말아야 해.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심지어 죽음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현재를 살아내서 미래를 열어야 해.’


 시간을 돌리고 싶은 충동과 살고자 하는 욕망이 뒤얽혀 미래를 방해하고 있었지만, 진실을 깨달은 이상 우주의 1년을 반복시킬 수는 없었다. ‘목숨을 건 도약’이 필요했다.


 그렇게 유봄은 현재에 남기를 ‘선택’했다.




 다시 폐에 물이 차오르는 고통이 유봄을 찾아왔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지만 절대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어둠 속에서 물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고 싶었다.


 그때 여전히 유봄의 몸에 닿아 있는 파도의 모서리를 향해 무언가 강렬하게 도약해오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느낄 수 있는지 이유나 원리는 알 수 없었지만 유봄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곧게 뻗어 있는 직선거리를 따라 무척 분명하고도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쾅!


 거대한 충돌이 있었다.


 “컥컥!”


 유봄은 숨을 가쁘게 내쉬며 고통스럽게 바닷물을 토해냈다. 산소를 다시 폐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온몸으로 바닷물을 뱉어내야 했다. 눈코입에서 눈물과 콧물, 침이 범벅이 되어 사정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잠시 후 겨우 정신을 차린 유봄이 그렁그렁한 눈을 들어 가장 먼저 보게 된 것은 추월 노인이었다. 노인이 설하나와 함께 갑판을 달려오고 있었다. 아, 지금의 내 얼굴은 완전 추한 모습일 텐데…. 그런데 갑판?


 그랬다. 유봄이 서 있는 곳은 뜬금없게도 한강 유람선의 갑판이었다. 그런데 유람선이 있는 곳이 바다가 아니었다. 유람선은 롯데타워에 비스듬히 꽂혀 있었다. 그랬다. 말 그대로 ‘꽂혀 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유람선은 마치 공간을 예리하게 잘라낸 것처럼 건물에 꽂혀 있었다. 그제야 유봄은 상황을 이해했다. 이 미치광이 노인네가 설하나와 함께 유람선을 훔쳐 타고 여기까지 도약했구나! 결국 일을 친 거야. 유봄은 깨달음과 안도감에 다리의 힘이 쫙 풀렸다.


 “한동은?”

 “남친은?”


 두 사람이 동시에 유봄에게 물었고, 곧바로 서로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유봄을 바라보았다. 남친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바닷물을 잔뜩 마셔 해명하거나 대답할 힘이 남아있지 않은 유봄이 ‘끄어궤엑’ 같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잘려 있는 비상계단 위의 철문을 가리켰다. 설하나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직 존재하는 파도의 모서리를 만졌다.


 놀라운 도약이었다. 과연 설하나는 공간지각에 천부적 재능이 있었다. 파도의 모서리라는 게 세상에 없었다면 서운했을 정도로 말이다. 한강 유람선은 계단과 철문을 포함해 아마 한동이 있을 위층 공간 일부를 통째로 실은 채 롯데타워에서 몇 km 떨어진 해상으로 다시 도약했다. 거대한 유람선이 흔들리며 출렁이는 파도가 느껴졌다.


 멀리서 철근이 휘어지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렸다. 하부가 잘려 나가는 바람에 지탱할 힘이 사라진 타워가 삐거덕삐거덕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며 서서히 옆으로 기울고 있었다. 대규모 공간 도약의 여파로 형성된 커다란 파도가 타워를 향해 밀려가는 것이 보였다. 파도가 부딪치자 타워는 그대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높이 555미터, 지상 123층의 대한민국 최고층 부동산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 마지막 편에 계속 >>

노을을 반사하는 롯데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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