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ve 4. 겨울의 타워
밤공기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저 멀리 롯데타워 꼭대기에서는 붉은빛이 흔들리며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 있었다. 인공적인 불빛이 거의 없는 시대였기에 더 눈에 띄었다. 동이 말에 따르면 야간 경계 시 각자의 위치를 파악하는 등대 역할을 하기 위해 땔감으로 불을 피우고 있는 거라 했다.
원래 예전부터 롯데타워가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우론의 눈’을 닮았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이렇게 어둠 속에서 꼭대기만 붉게 타오르고 있으니 더더욱 그 어둠의 군주가 지배하는 탑을 연상케 했다.
높이란 곧 권력이다. 그리고 롯데타워는 서울 시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압도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부동산’이었다. 혹시 빙하에서 탄생한 문제의 그 ‘4차원 거미’도 가장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기 위해 이곳을 중심으로 삼은 것 아닐까? 어쩌면 번개가 피뢰침에 떨어지듯 우주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하필 롯데타워로 떨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유봄과 한동은 그런 생각들을 주고받으며 마침내 목적지인 잠실로 진입했다.
“갑자기 내린 눈 때문에 길을 잃어 해적들과 마주치는 바람에 복귀가 늦었다고 보고하려고. 그 과정에서 실제로 교전까지 벌이게 되어 배가 이 모양이 되었으니 나를 의심하지는 않을 거야.”
“그래. 조심해.”
그 말로 유봄은 왜 눈이 오는 날에 탐사조인 한동이 영등포를 방문하는 패턴이 만들어진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동이는 부대에 눈 핑계를 대고 영등포에 들를 생각이었구나.’
미래의 패턴이라는 것이 때로는 사소한 이유로 결정된다.
“그런데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타워 안에는 모서리가 안 보이더라고. 정말 이번에 가면 새로 생겨나 있는 걸까?”
“글쎄. 위치상 타워에 있어야 하는 건 맞잖아. 혹시 물이 없으면 모서리가 안 보이는 거 아닐까? 이번에도 안 보이면 바닷물을 한번 허공에 부어보자.”
“생각 못 한 방법이긴 한데, 그게 통할까?”
“뭐라도 해봐야지.”
유봄은 가방에서 스타벅스 텀블러를 꺼내 바닷물을 가득 채웠다. 달빛이 바닷물에 부서져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동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봄아, 왜 하필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 둘이서 함께 지구를 구하러 가게 된 걸까?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신기하지 않니? 나는 지금 무슨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야. 이건 어쩌면 우주가 우리에게 어떤 필연적 역할을 맡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
“동아, 너무 의미 부여하지 마. 그리고 지구를 구하러 가는 거 아니야. 지구는 지극히 멀쩡하니까. 그 멀쩡한 지구가 인간을 멸종시키려 해서 문제지. 우리는 다만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가고 있는 거야.”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던 한동이 입을 떼었다.
“봄아.”
“왜?”
“거기서 무슨 일이 있건 내가 꼭 지켜줄게.”
“뭐래? 네 몸이나 지키세요.”
갑작스러운 직진 멘트에 약간 당황한 유봄이 핀잔을 주며 한동을 쳐다봤지만 한동은 핸들을 꽉 쥔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덕분에 갈 곳을 잃어버린 유봄의 시선도 앞을 향했다. 보트의 앞 유리가 깨져 있어 겨울바람이 그대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지만 왠지 아까보다 덜 추운 것 같았다.
초소가 가까워지자 한동은 기어를 조절해 보트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 유봄은 계획대로 모포를 뒤집어쓰고 몸을 숨겼다. 다시 칼날 위에 선 것 같은 긴장감을 유지해야 하는 시간이 돌아왔다.
야생의 삶이라는 것이 이렇게 날 선 긴장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해일 이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먼 옛날 인류의 조상들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생존해온 걸까?
“어이, 한동! 이번에는 엉망으로 당했네. 해적이야?”
“예, 병장님. 진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조심히 다녀. 그러다 죽으면 너만 손해야.”
“예, 감사합니다. 충성!”
초소를 지키는 군인은 다행히 한동과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초소를 통과하자 한동은 다시 보트에 속도를 붙여 부두가 있는 타워 19층 안쪽으로 진입했다. 유봄이 탈출하던 날과 달리 의자에 따분하게 앉아 있는 군인 둘만 보였다. 한동은 배를 구석에 댄 후 건물 바닥으로 올라섰다.
“충성! 신고합니다.”
한동이 시선을 끌며 복귀 신고를 하는 동안 유봄은 재빨리 한동이 미리 알려준 배로 이동했다. 응급상황을 위한 구급선으로 평상시에 거의 사용하지 않아 숨어 있기 좋을 거라 했다. 일부러 저녁 점호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들어왔기 때문에 타워는 어둡고 조용했다.
한동은 유봄이 예정대로 잘 숨어 있음을 눈으로 확인한 후 당직사관을 데리고 보트로 돌아갔다. 잠시 후 영등포에서 미리 실어둔 라면과 참치 캔 박스를 들어 내용물을 보이자 유봄이 숨어 있는 곳까지 들릴 정도로 커다란 감탄사가 나왔다. 당직사관이 한동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 보였다. 애초에 한동은 식량 수색을 목적으로 나간 것이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해 오기만 하면 보트가 파손된 채 늦게 돌아오더라도 잘 넘어갈 수 있을 거라는 말이 사실이었다.
한동은 계획대로 라면을 권하며 부두 입구를 지키고 있던 군인 두 사람을 데리고 당직사관실로 들어갔다. 유성 펜 같은 것으로 누군가 벽에다 ‘당직사관실’이라 대충 써놓은 방이었다.
이제 유봄이 나설 차례였다. 라면을 끓이는 시간 5분, 라면을 먹는 시간 10분. 약 15분의 시간 동안 파도의 모서리를 찾아야 했다. 유봄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계산하면서 부두 주변의 바다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시선을 열심히 돌려봐도 한동의 말처럼 파도의 모서리는 없었다.
유봄은 스타벅스 텀블러를 꺼냈다. 그리고 건물의 중심부라고 생각되는 곳에서부터 바닷물을 뿌리며 공간이 왜곡되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파도의 모서리는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나 바닷물을 다시 텀블러에 담아 와서 구석구석 뿌려봤지만 마찬가지였다. 거미줄의 중심부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못 찾는 것일까.
‘4차원 거미야, 어디 숨었니?’
유봄은 손목시계의 날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1월 17일. 노인의 말대로라면 분명 오늘이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었다. 적어도 오늘은 파도의 모서리가 이곳에 있어야만 했다. 노인의 가설을 계속 믿을 것인가, 아니면 수정할 것인가.
유봄은 초조하게 머리를 굴리며 타고 온 보트와 구급선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벌써 15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일단 다시 숨어야 하나.’
만약 이번에도 타워 내부에서 파도의 모서리를 못 찾을 경우 숨어서 기회를 보다가 한동과 함께 타워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노인이 종이 지도 위에 자를 대고 손으로 그린 거미줄이었기에 정확한 중심부의 위치는 다소 오차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유봄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두운 파도 위에서 배들이 한가롭게 출렁이고 있었다. 어떻게 외벽과 바닥의 일부를 깨서 이렇게 거대한 건물의 실내에 부두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그 순간 어떤 생각이 유봄의 머리를 스쳤다.
‘잠수하자. 이 건물의 정가운데는 아직 바닥 아래에 잠겨 있잖아? 그러니까 진짜 중심부의 바다는 아직 확인하지 못한 셈이야. 노인의 가설이 맞다면 이 빙하 속에서 나온 4차원 거미는 아마 바다에 사는 해양 생명체일 거야. 그러니 지상에서 바닷물을 뿌릴 것이 아니라 물속으로 들어가 아래층을 봐야겠어!’
하지만 밤이었고 바다는 어두웠다. 잠수를 하더라도 불빛이 없다면 시야 확보가 어려울 것이었다. 잠수장비가 있으면 좋겠지만 있다 하더라도 유봄은 사용법도 몰랐다. 여유롭게 준비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일단 급한 대로 어두운 곳을 비춰줄 도구를 찾았다.
손전등 같은 게 어디 없을까? 맞다, 비상계단! 지난번 이곳을 탈출할 때 그곳에서 본 게 있었다. 재빨리 19층 비상계단의 철문을 열고 벽을 살폈다. 기억대로 벽에서 뽑으면 자동으로 켜지는 손전등이 있었다.
‘빙고!’
뽑자마자 전등에 불빛이 들어왔다. 다행히 아직 작동하고 있었다. 손전등을 챙긴 유봄이 다시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문을 열자마자 이마에 차가운 금속성 물체가 닿았다.
“이게 누구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