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ve 4. 겨울의 타워
매서운 바람이 살갗을 따갑게 파고들었다. 그 흔한 로션이나 수분크림 하나 없이 겨울을 맞이하게 되다니! 작년까지만 해도 유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나마 노인 덕분에 패딩 점퍼라도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싶었다.
유봄은 권총을 장전하고 빈 깡통을 겨냥했다. 권총을 쥔 양손을 깍지 끼듯 앞으로 내민 채 서서히 내리자 표적과 총구, 시선이 일직선상에 놓였다. 규칙적인 호흡에 따라 입김이 하얗게 나와 시야를 가렸지만 숨을 멈추면 이내 사라졌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유봄은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3분의 1가량 뱉어낸 후 호흡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호흡이 시작되기 전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팅! 플라스틱 BB탄이 깡통에 맞아 튕기는 소리가 청량했다. 또 명중이었다.
“이 장난감 총으로 사격 연습을 하라고요?”
처음 노인에게 플라스틱 권총을 건네받았을 때 황당한 마음에 소리치며 반발했지만 노인은 ‘대한민국 마트에서 진짜 권총을 팔지 않는데 어떡하겠냐?’는 식이었다. 과연 그랬다. 노인은 시간여행까지 할 수 있는 미치광이 과학자이긴 했지만, 아무리 시간여행자라 하더라도 대한민국은 일개 과학자가 총기를 구할 수 있는 나라는 아니었다. 그리고 노인이 준비한 장난감 권총은 유봄이 탈취한 중대장의 권총과 동일한 모델로 언뜻 외관만 봐서는 무엇이 진짜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였다.
아무리 가짜 총이라 해도 연습을 하면 할수록 사격 실력이 실제로 늘었다. 어차피 실탄은 한 발밖에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진짜 권총으로 연습할 수는 없었다. 단 한 발로 그 정체조차 가늠할 수 없는 ‘4차원 거미’ 씨와 싸우기 위해서는 여러 변수들을 줄여 실패 확률을 최소화해야 했다.
겨울의 바닷바람은 그야말로 칼바람이었다. 30분 남짓 연습하자 피부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유봄은 스스로에게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단호하게 선언한 후 따뜻한 실내로 돌아갔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적어도 유봄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어쩌면 난방 장치 없이 보내는 첫 겨울이라서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다행히 추월 노인이 핫팩도 창고에 잔뜩 쟁여두었기 때문에 침낭 안에 들어가면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다른 인류는 침낭도 핫팩도 없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아마도 땔감을 구해 밤새도록 불을 피우며 버티고 있을 그들을 생각하면 유봄의 삶은 사치스러운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모두 노인이 유난히 추운 겨울을 미리 대비해둔 덕이다.
다만 ‘유난히’ 추운 겨울이라는 그 말이 노인에게만큼은 성립하지 않았다. 그 유난함을 무려 서른세 번째 겪고 있었으니까.
온난화로 지구의 평균 기온이 올랐다고 해서 겨울이 춥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폭염과 혹한이 번갈아 오면서 생명체에게는 더욱 가혹한 환경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날이 추워질수록 인류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겨울 식량을 비축하기 위해, 따뜻한 거주지를 확보하기 위해 해적과 군인이 교전을 벌이고 산적과 해적이 전쟁을 했다.
특히 과거 인류가 지어놓은 ‘부동산’을 확보하기 위해 가장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대부분의 건물이 바다에 잠기고 비록 고층부만 남아있었지만 여전히 부동산은 인류가 겨울을 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주로 고층 건물이 모여 있는 강남 일대가 격전지였다. 하지만 종종 영등포까지도 원정을 오는 세력들이 있었기에 방심할 수 없었다.
노인에게는 ‘미래가 기록된 달력’이 있었다. 이 달력에는 어떤 날 불청객이 찾아오게 되는지도 모두 적혀 있었다. 두 사람은 해적이나 군인이 나타나는 시간에 맞춰 카누를 타고 노를 저어 인근의 눈에 띄지 않는 건물에 숨었다가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다. 매년 똑같은 날짜에 똑같은 일이 그대로 반복되는 건 아니었지만 A 패턴 아니면 B 패턴, 신기하게도 두 가지의 패턴만이 특정한 확률로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노인의 관점에서 미래는 확률적 패턴들의 조합에 불과했다.
처음에는 불쾌한 거부감이 있었지만 유봄은 자신의 말과 행동을 미리 예측하고 있는 노인의 화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그 예측을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는 날조차도 예측 범위 내에 있었다. 한 번은 너무 약이 오른 나머지 노인이 걸어가는 길목을 숨어서 지키다가 BB탄 권총으로 저격을 하려 했는데, 별안간 노인이 유봄의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 기습적으로 권총을 빼앗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노인은 자신의 달력을 펼쳐 이미 적혀 있던 ‘3일간 권총 압수’를 기세등등하게 보여주며 유봄을 더욱 약 올렸다.
그 후로도 몇 번의 시도 끝에 내 인생이라는 게 특별할 게 없구나, 하는 허망함을 느끼며 유봄은 노인의 경험을 존중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잘 맞는 일기예보 같은 느낌이랄까. 사실 예측되는 미래를 맞이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편안한 일이었다.
노인은 유봄과 함께 매일 틈틈이 작전과 가설에 대해 논의했다. 그 외의 시간에는 낚시도 하고 사격 연습도 하고 만화책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식량은 충분했다. 그들은 겨울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개미들의 세계에서 게으른 채 겨울을 맞이할 수 있는 유일한 베짱이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하늘에서는 첫눈이 오고 있었다. 건물 난간에 기대어 나풀나풀 떨어지는 눈송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유봄에게 노인이 다가왔다. 노인은 유봄의 곁에 서더니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오겠군.”
이제 노인의 화법도 익숙했다.
“이게 날씨와 상관 있나요?”
“그렇더라고. 이유는 모르겠고 패턴이 그래. 이날 눈이 올 경우 탐사조가 돌아오게 되는 패턴이야.”
유봄을 잠실까지 실어 나를 탐사조가 도착하는 패턴도 두 개. 오늘 오후에 도착하거나, 일주일 후 오전에 도착하는 것.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노인은 내리는 눈을 보고 오늘이라고 예측했다.
“아예 타임스퀘어 건물 앞에다 점집을 하나 차리시죠. 장사 잘 될 것 같은데.”
“그럴까?”
유봄은 탐사조가 어떤 사람인지 늘 궁금했다. 그동안 몇 번을 물어봤지만 노인이 미리 알 필요 없다며 말을 아끼는 바람에 오히려 궁금증이 증폭됐다. 수다쟁이 과학자가 유독 이 주제에 대해서만큼은 입이 무거웠다. 그리고 잠시 후 유봄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 멀리서부터 엔진 소리가 점점 커지며 동력 보트가 하나 다가왔다. 노인이 미동도 없이 보트를 지켜보고 있었기에 유봄은 그가 탐사조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과연 노인의 패턴은 한 치의 오차도 없구나, 감탄하며 보트가 속도를 줄이며 정박하는 것을 구경했다.
보트에 타고 있는 사람이 군복을 입고 있었기에 유봄은 살짝 긴장하며 주머니 속에 있는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노인의 패턴을 믿고 있었지만 여름의 기억 때문에 여전히 군인은 무서웠다. 차가운 공기에 싸늘하게 식은 권총의 금속성 질감을 느끼며 언제든 뽑아들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이 배에서 내려 이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 사람도 유봄만큼이나 놀랐다.
“봄이?”
“동이?”
노인이 말한 탐사조가 오랜 동네 친구 한동이었다니! 이 모든 걸 알고서 미리 알려주지 않은 노인은 음흉한 것인가, 아니면 깜짝 선물을 의도한 것인가.
“무사했구나!”
“너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포옹했다. 이 험난한 지구에서 두 사람 다 멀쩡히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도 잠시, 노인의 목소리가 겨울 바람처럼 날카롭게 울렸다.
“돌아왔으면 탐사 결과부터 먼저 알려주지?”
노인의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쌀쌀맞았다. 유봄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야, 저 혼자 나이는 먹을 만큼 먹어놓고 이제 와서 질투라도 하려는 건가.’
한동은 노인에게 다가가 주머니에서 메모를 꺼냈다. 노인은 지도를 펼쳐 메모에 적힌 내용을 옮기기 시작했다. 유봄도 그들 옆에 서서 기웃거렸다.
“위치와 날짜가 계산하신 것과 일치하더라고요. 다만, 중심부의 타워에서는 모서리를 찾지 못했어요.”
“그래? 이번에는 어디를 찾아봤지?”
노인은 이미 알고 있는 문제라는 듯이 한동을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일단 해수면이 있는 부두 근처에서 계속 찾았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없길래 혹시 중심부의 모서리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게 아닐까 해서 옥상에도 몇 번이나 가봤어요. 가장 높은 건물이 중심이 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해서요.”
“이번에도 자네는 패턴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군. 그래서 옥상에서 뭔가 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고?”
듣기에 따라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말투였으나 한동은 익숙한지 전혀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네, 선생님. 혹시 중심부에는 모서리가 없는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싶어. 이론상 중심부에서는 1년 전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모서리가 생겨나기 전의 시간대로는 돌아갈 수 없으니 아직 찾을 수 없었을 거야. 아마도 각각의 모서리가 활성화되는 시기가 있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야. 중심부일수록 더 나중에 활성화되는 거지.”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어떻게 알죠?”
“유봄이 알아. 내 가설은 다 말해 두었으니까.”
그리고 노인은 더 이상 방해하지 말라는 듯한 태도로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동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한동은 유봄을 한 번 흘깃 쳐다보고는 노인에게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그런데 침투조가 봄이었어요? 엄청 위험할 것 같은데 그냥 제가 그 역할까지 하면 안 되나요?”
“그럼 자네가 말려보던가. 아마 실패하겠지만.”
노인은 이번에도 이미 한동의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조차 들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자 한동은 이제 유봄 쪽을 바라봤다. 유봄은 팔짱을 낀 뒤 단호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저 말이 맞아. 넌 실패할 거야.”
한동은 그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할 수 없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래, 네 고집을 내가 어떻게 막겠냐.”
그러더니 터덜터덜 부엌으로 가서 믹스 커피를 찾기 시작했다. 부스럭부스럭 찬장을 뒤지고 버너에 물을 끓여 커피를 두 잔 타더니 한 잔을 유봄에게 내밀었다. 너무 자연스러운 거 아니니? 여기 너희 집 아니거든?
“이 커피가 그렇게 먹고 싶더라고.”
“그래?”
“이젠 커피 같은 거 어디서도 볼 수 없으니까.”
“그렇지.”
두 사람은 뜨끈한 커피를 호호 불며 한 모금씩 홀짝였다.
“걱정했었어.”
한동이 툭 던진 말에 유봄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응, 나도.”
그리고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만남에 서로 할 말이야 많았지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침내 유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 엉뚱했다.
“너 그날 왜 자전거 타러 안 나온 거야?”
“뭐?”
갑자기 동이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별것 아닌 질문에 왜 저래? 수상하게.
“못 나온 거야.”
그리고 한참을 횡설수설하던 한동의 주장을 요약해 보자면 이랬다. 그날 사실 자신은 집에 있지 않았고 유봄에게 주기 위해 편지지와 선물을 사러 갔다가 해일에 휘말렸는데 마침 마트 근처에서 떠다니는 튜브를 잡고 이리저리 파도에 쓸려다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노인이 구해줬다는 이야기였다.
“음, 그러니까 나한테 고백하려고 했다는 거지?”
유봄의 간결한 정리에 한동은 또다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지만 별로 유의미한 단어나 문장들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오히려 유봄에겐 자신의 마음이 중요했다.
‘글쎄. 인류가 멸망할까 말까 하는 이 시점에 연애 같은 걸 시작해도 되는 걸까?’
한편으로는 오히려 뭘 하든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했지만 복잡한 고민이 싫어서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한동에게도 고백하려 하던 때와 지금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으니까. 마음은 그때와 같은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알았어.”
“알았다니 그건 대체 무슨?”
한동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네가 왜 그날 자전거 타러 안 나왔는지 알겠다고.”
그 말에 한동은 갑자기 목에 사레가 들린 소리를 내며 컥컥거리기 시작했고 노인은 멀리서 히죽 웃었다. 음흉한 노인네 같으니. 이번에도 내 대답을 미리 알고 있었겠지?
미래가 쓰여진 노인의 달력으로 오래 전부터 한동이 방문하는 날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기에 모든 과정은 순조로웠다. 마지막 라면 박스를 한동의 보트에 실으며 유봄은 경쾌하게 노인에게 물었다.
“이게 마지막이죠?”
“그래.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어.”
노인은 손에 들고 있던 체크리스트의 마지막 항목을 볼펜으로 지웠다.
“그럼 이제 최후의 만찬 시간인가요?”
“그래. 올해도 최고의 식사를 준비해 보마.”
“오늘은 술도 꺼내주시는 거죠?”
“물론! 최후의 만찬에 술이 빠질 수는 없지!”
그들은 영등포에서의 마지막 한 끼를 든든하게 먹은 후 잠실로 출발할 계획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계획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였다. 한동이 유봄을 살짝 어색하게 대하고 있는 것만 빼고는.
‘역시 마음을 들켜서 어색한 걸까? 하지만 지금은 받아줄 수 없는 걸.’
유봄은 노인과 부대찌개를 준비하다가 문득 이 상황에서 노인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노인의 표정을 쳐다본 유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건 지금까지 노인이 단 한 번도 유봄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표정, 바로 경악이었다. 노인이 신음소리를 내듯이 말했다.
“말도 안 돼.”
순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노인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서는 거대한 유람선 한 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봄은 그 유람선에서 펄럭이는 거대한 깃발을 보고 노인과 똑같은 표정을 짓게 되었다. 깃발에 붉은 해골 마크가 섬뜩하게 그려져 있었다.
여의도에서 만났던 그 해적선이었다.
“저게 오늘 오면 안 되는데….”
그 한마디로 유봄은 단숨에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패턴이 붕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