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ve 3. 가을 노인
“그럼 이제 파도의 모서리를 직접 보러 갈 시간이야.”
노인은 따라오라는 듯 일어나더니 자연스럽게 앞장섰다. 그는 건물의 비상계단으로 이어지는 철문 앞에서 유봄을 기다렸다. 유봄은 권총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그 다중우주의 경계선인지 뭔지 하는 것을 직접 보여준다는 거지?’
이제 이 사람이 미친 건지 이 세계가 미친 건지 확인할 시간인 것 같다.
유봄은 노인을 따라 철문 앞에 섰다. 노인은 철문을 열었다. 끼익하는 오래된 금속음과 함께 철문이 열리자 특별할 것 없이 여느 건물에 있는 것과 같은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비상계단이 보였다. 다만 몇 계단 아래에는 바닷물이 가득 차 있어 더 이상 내려갈 수는 없었다.
어쩌라는 거냐? 하는 표정으로 노인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노인은 저절로 닫히는 철문을 유봄에게 받치도록 한 뒤 혼자서 계단을 내려갔다. 노인의 허리께까지 물에 잠겼을까. 그는 고여 있는 물을 두 팔로 힘껏 휘저었다. 수면에 파도가 일었다.
출렁이는 물결 속에서 유봄은 아주 선명하게 그것을 ‘관측’할 수 있었다.
파도가 잘렸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시각적인 상식을 깨뜨리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마치 허공에 매끈한 유리벽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유봄은 아쿠아리움에서 유리벽 너머를 보는 것처럼 파도의 잘린 단면을 볼 수 있었다. 네 개의 바다가 맞닿은 지점은 ‘+’ 모양으로 뚜렷이 구획되어 바닷물이 서로의 경계선을 넘지 못했다. 바다에 모서리가 있다는 건 이상했지만 그곳은 분명히 모서리였다. 노인은 그 투명한 경계선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넘나들며 파도를 일으켰다.
“바로 이곳에서 지나간 하루를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노인의 목소리에 유봄은 정신이 돌아왔다. 하루하루 생존하기조차 힘겨웠기에 굳이 지나간 하루를 다시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방법이 궁금했다.
“어떻게 하면 되죠?”
“모서리를 손으로 잡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절로 알 수 있게 돼. 다만 몸을 모서리 중앙에 위치하도록 하는 것을 잊지 마.”
“왜죠?”
“매번 과거로 가져갈 물건을 챙기면서 늘 어느 반경까지 원본의 기억이 유지된 채 가져갈 수 있는지 궁금했거든. 그런데 모서리 중앙에서 벗어난 실험을 한 기억이 없는 것으로 봐서, 일정 반경을 벗어난 실험을 했던 우주에서는 내 기억이 리셋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이상한 얘기였다. 기억이 없다고 리셋을 의심해야 하다니. 유봄은 그 사실을 지적했다.
“궁금해하기만 했을 뿐 아직 실험을 안 한 것일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다.
“과학자는 궁금한데 실험을 안 하는 일은 없는 족속이야.”
그때였다. 바깥에서 요란한 소음이 들렸다. 사람들의 말소리였다. 내다보니 익숙한 해골 모양의 그림이 그려진 돛이 보였다. 유봄의 오리배를 발견하고 추적해온 해적들인 것 같았다. 해적들은 벌써 배에서 내려 유리문 앞까지 진입하고 있었다. 유봄은 권총을 장전했다. 그때 어느새 곁에 다가온 노인이 살며시 손을 들어 유봄의 총구를 내렸다. 그는 의아해하며 쳐다보는 유봄을 향해 차분하게 말했다.
“유봄아, 내가 나가보마. 너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여기에 있거라. 절대로 나오면 안 돼. 그리고,”
노인은 유봄과 눈을 맞추며 굳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파도의 모서리를 꼭 기억해야 해.”
노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해적들은 곧바로 저 오리배가 어디서 났느냐며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머리와 야수 같은 눈매, 유봄의 오리배에 올라탔던 그 해적도 함께 있었다. 노인은 오리배가 저절로 흘러오는 바람에 우연히 얻었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은 유봄을 어디 숨겼는지 추궁했다. 노인이 모르는 일이라며 완강히 부정하자 그들도 할 수 없다는 듯 돌아서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야수 같은 해적이 노인에게 달려들어 식칼로 마구 찌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닥친 끔찍한 장면에 유봄은 비명을 지를 뻔했으나 가까스로 숨을 삼켰다. 온몸을 난자당한 노인은 그 자리에서 즉사한 듯 무력하게 몸이 흘러내렸다. 유봄은 손을 덜덜 떨면서 다시 권총을 들었다. 단 한 발로 저들을 제압해야 하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여기 전부 샅샅이 뒤져!”
해적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유봄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서른세 번째 1년을 반복하고 있다더니 고작 이런 일 하나 예측을 못하시는 건가요?’
그때 유봄의 머리에 어떤 생각이 하나 스쳤다. 지금까지 노인은 유봄에게 자신의 주장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파도의 모서리를 기억하라고 했다. 만약 노인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다음 순간 유봄은 다시 철문을 향해 뛰었다. 벌컥 철문을 열고 비상계단으로 내려가 고여 있는 바닷물에 첨벙 뛰어들었다. 쿵! 철문이 저절로 닫히는 소리가 밀폐된 공간에 울렸다. 아마 곧 해적들이 쫓아오리라. 유봄은 앞이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파도의 모서리를 찾았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때 철컹하고 문이 열렸다. 쫓아온 해적들이었다. 야수 같은 해적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식칼을 들고 말했다.
“여기 있었네!”
사실 해적이 한 말은 유봄도 하고 싶은 말이었다. 철문이 열리며 빛이 들어오자 곧바로 파도의 모서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유봄은 파도의 잘린 단면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 순간 유봄은 ‘무언가’와 연결되었다. 그곳에는 무수한 시간들이 공간처럼 존재했고 그것은 모두 하루 전의 시간들이었다. 유봄은 그 어느 곳이든 옮겨 다닐 수 있었고 그 어느 곳에서든 그곳의 하루를 복제하여 새로운 하루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유봄은 그중 하나의 시간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유봄은 오리배를 타고 영등포로 접어들고 있었다.
영등포의 랜드마크인 타임스퀘어의 간판을 보았고 먼 산의 단풍을 보았다. 유봄은 마치 꿈을 꾼 것처럼 하루 전으로 돌아갔다. 사실 하루 뒤가 꿈인지 하루 전이 꿈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몽롱한 기분으로 유봄은 하루를 다시 살아냈고, 다음 날 아침 안개가 자욱한 건물들 사이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노인을 다시 만났다.
“유봄아, 기다렸다.”
유봄은 아무 말 없이 오리배를 건물 기둥에 묶고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해명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노인을 조용히 노려봤다.
“아, 이건 두 번째 유봄이로군.”
다시 살아난 노인이 태연하게 말했다.
“이걸로 내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증명은 충분히 된 거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유봄은 급기야 노인에게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다.
“뭐 이렇게 무식한 증명이 다 있어요? 지금까지 대체 몇 번이나 죽은 거예요?”
노인은 유봄이 화내는 것조차 예상했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내 기억을 기준으로 얘기하자면 너를 처음 만날 때부터 죽기 시작했으니 최소한 서른세 번은 죽은 셈이지. 그래도 꽤 죽을 만해. 왜냐하면 ‘죽은 나’는 어차피 또 다른 다중우주의 ‘나’이기 때문에 정작 ‘나’는 죽은 기억이 없거든.’
정말 이 노인이 과학자인지 철학자인지 모르겠지만 미치광이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정신세계의 기반 자체가 완전히 다른 사람과 대화로 실랑이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래서 유봄은 두 사람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지적했다.
“좋아요. 그럼 일단 해적 문제부터 해결하죠. 그들을 막을 방법은 있나요?”
“간단해. 오리배를 바다에 떠내려 보내면 해적들은 오지 않아. 그들은 오리배를 발견하고 오는 거니까. 이건 서른두 번의 실험을 통해 검증된 사실이야.”
“뭐라고요? 오리배를 떠내려 보낸다고요?”
지금까지 유봄의 생명줄과도 같았던 오리배였다. 이 정신 나간 과학자가 대체 뭐라는 거야? 하며 발끈한 유봄이 온갖 비난과 심한 말을 쏟아내려고 하는데 노인이 먼저 말을 잘랐다.
“자세한 얘기는 생선구이부터 먹으면서 하는 게 어떨까?”
유봄은 찬성했다. 이 와중에도 배는 고팠고 공기 중에 진동하는 생선구이 냄새는 견딜 수 없이 유혹적이었다. 오늘도 김과 햄이 있겠지? 유봄은 생각했다.
‘이 노인네 완전 프로 가스라이터인데?’